불교 이야기

- 6.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 묘행은 머무름이 없음) -

수선화17 2023. 1. 6. 23:25

(진우 스님의 금강경 강설)

- 6.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 묘행은 머무름이 없음) -

 

보살은 마땅히 모든 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 해야 한다

‘법에 머무는 바 없이’에서의 법은 바로 육바라밀 말씀하신 것

보시는 몸과 마음 일체의 것 희사해 아상 버리는 최상의 방법

인과와 공 확연히 알아야 주고 받는 상 머물지 않는 해탈 가능

 

부차 수보리 보살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수보리 보살 응여시보시 부주어상

(復次 須菩提 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또 수보리야, 보살은 모든 법에 머무른 바 없이 보시해야 할지니,

이른바 형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고, 빛과 소리,

냄새, 맛, 접촉, 법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마땅히 이러히 보시해야 하느니 모양에 머물지 말 것이니라.

 

‘법(法)에 머무는 바 없이’라고 할 때의 법(法)이라 함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말씀하심이다.

즉,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의 여섯 가지의 바라밀이다.

 

첫째 지혜(智慧)란, 일체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장애를 벗어나는 법을 잘 아는 마음이다.

선정(禪定)이란, 나의 본래 마음의 자성(自性)은 걱정과 근심, 우비고뇌(憂悲苦惱)가 없었는데,

수 억겁(億劫)에 걸쳐서 욕심을 부린 탓에 그 인과로 인하여 괴로움과 고통이 끊이질 않아 왔으니,

이제 업(業)으로 똘똘 뭉쳐진 번뇌를 고요히 쉬게 함으로써,

점차적으로 숙업(宿業-오래 된 업)을 멸하여 가는 과정을 말한다.

 

정진(精進)이란, 하루 한시도 쉬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다하여 꾸준히 선정(禪定)을 닦기 위해,

기도‧염불‧참선‧보시‧인욕 등을 행하는 실천이다.

인욕(忍辱)은 욕먹음에 원한의 마음을 갖지 않고,

남에게 교만하지 않으며, 억울하고 분하고 성내지 아니함을 이름 함이다.

사바세계는 참아야 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참지 않으면 인과(因果)를 벗어날 수 없을 뿐더러, 천상과 지옥을 계속 오고 갈 뿐이다.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分別)을 참고 또 참는 것이 인욕행(忍辱行)의 핵심이다.

지계(持戒)라 함은, 몸으로 짓고 말로 짓고 생각으로 짓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청정히 하여 못된 버릇의 업(業)을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계(戒)를 지키지 않음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니,

곧 욕심과 탐심, 욕망을 통해 즐거움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에는 인과(因果)가 붙기에 괴로움의 과보(果報)를 받아야 할 것이니,

계를 지킨다는 것은 곧 인과(因果)를 낳지 않고 고통을 받지 않음이다.

보시(布施)란, 몸과 마음에 있는 일체의 것을 희사하여 곧,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을 이름 함이다.

무슨 말이냐? 내 것이라는 아상(我相)을 버리기 위함이다.

아상(我相)은 인과(因果)를 낳고, 인과는 고통을 수반하므로

즉, 보시는 결국 나의 고통을 미연에 방지하는 최선의 방법이 된다.

때문에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가장 우선으로 치는 것이다.

 

색(色)에 머물지 않는다함에서부터, 빛과 소리, 냄새와 맛,

닿음(접촉)과 모든 법에 이르기까지 6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니,

6진 또는 6경이라 함은 6근의 상대되는 세상을 말한다.

첫째 색진(色塵)은 일체의 색과 일체의 형상 모양이니,

5방색과 방(方)‧원(圓)‧장(長)‧단(短)을 이름 함이다.

둘째, 성진(聲塵)은, 귀에 들리는 일체의 소리를 이름이니,

오음육율(五音六律)과 희로애락의 소리와, 공포 등을 말한다.

그리고 셋째, 향진(香塵)은 코로 맡아지는 일체의 냄새를 말함이다.

넷째, 미진(味塵)은 혀에 알리는 일체의 맛이니, 짜고 달고 시고 쓰고 맵고 등의 맛을 의미한다.

다섯째, 촉진(觸塵)은, 몸에 부딪치고 닿는 일체의 촉감을 말하는데,

곧 부드럽고 깔깔하고 연하고 단단하고 차고 덥고 등을 말한다.

여섯째, 법진(法塵)은 위의 다섯 가지 5진을 상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좋고 싫은 분별(分別)을 이름 함이니, 일체의 선악법(善惡法)을 지어내게 된다.

 

이로써 지금부터 부처님께서는 제 3단 법문을 시작하시는데,

이 ‘금강경’을 설하시기 이전에도

저 언덕에 도달하는 법을 여섯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것이 곧 6바라밀법이니, 먼저 6바라밀에 대해 사전 지식이 필요하여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수보리(須菩提)를 불러

바라밀법(波羅蜜法)에 머물지 말고 보시(布施)를 하라 말씀하신 것일까?

저 언덕에 도달하는 법으로는 일체중생을 멸도(滅度)함을 말씀하셨고,

이어 자취를 없게 하기 위하여 사상(四相-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머무름이 있으면 보살(菩薩)이 아니라고 하셨다.

 

즉, 한 점의 괴로움과 고통이 없는 곳에 이르기 위해서 저 언덕에 도달하는 법을 말씀하신 것이니,

그 법이 바로 부처님께서 설하셨던 육바라밀법(六波羅蜜法)을

또다시 꺼내시어 대중들이 궁금해 하는 점을 밝히려 하셨다.

 

대중이 궁금해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일체중생을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넣어 멸도(滅度)하되

사상(四相-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육바라밀법(六波羅蜜法)을 말씀하시는 것에 또 머무름이 생기는 것이 되므로,

머무르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과 배치되지 않는가하는 점이다.

왜 그럴까?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첫머리에 있는 보시(布施)로만 보더라도,

주고받는 사람이 있어야 보시(布施)가 되는 것이니, 나와 남이 없을 수 없는 것이고,

나와 남이 있다는 것은 곧,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 벌써 생겨버리게 되므로,

사상(四相)에 머물지 말라고 하신 말씀과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 다음 지계(持戒)와 인욕(忍辱), 정진(精進)과 선정(禪定), 지혜(智慧)가 모두 그러할지니,

이를테면 계(戒)와 계(戒)를 가지는 자가 있을 것이고, 인욕과 인욕자가 있을 것이며,

정진과 정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선정과 선정자가 있을 것이며,

지혜와 지혜자가 있을 것이니, 곧 상대적이요, 상대가 있으면 사상(四相)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상을 빼놓고는 육바라밀법(六波羅蜜法)을 행한다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말이 되는 것이니, 전에 말씀하신 육바라밀과 이 경에서

사상(四相)에 머물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서로 배치되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부처님께서는 대중의 이러한 의심을 이미 아시고,

이 뜻을 밝히시려고 수보리를 불러서 즉시 말씀하신 것이니,

즉, “보살이라면 육바라밀법(六波羅蜜法)에도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보시(布施)를 행할 것이니” 라고 하시고,

다음 말씀으로 육바라밀법에도 머무름 없이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머무름 없이 행하는 보시(布施)가 되는가?

먼저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즉, 아상(我相)은 본디부터 잘못된 생각으로서,

나라는 생각이 있으면 벌써 남이 생기는 것이고,

남이 생긴다는 것은 곧, 분별(分別)하려는 생각을 낳게 되고,

이어 육근(六根-안이비설신의)에 집착하게 되는 고로,

육근(六根)에 집착하게 되면 일체 모두가 나와 남으로 나뉘게 되니,

나를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온갖 욕심을 부리게 될 수밖에 없음이다.

 

육근(六根)에 집착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눈에 보이는 색(色-물질, 대상)에 머물지 말아야 함이니,

색(色)에 머물지 않게 되면 곱고 추한 것이 없어지고,

친하고 멀어지는 것이 없어지며, 따라서 나와 남이 없어지게 된다.

이어서 귀에도 코에도 혀에도 몸에도 뜻에도 머물지 않게 된다면,

결코 이것과 저것이 없어지는 동시에, 좋고 싫은 것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하게 되면,

보시를 하더라도 보시한다는 생각이 없어지게 됨은 물론, 곧 사상(四相)에 머물지 않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相)에 머물지 말지니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현실에 있어서 과연 가능한 일일까? 물론 어렵고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은 결국 변하고 없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니,

집착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우선 뼈저리게 체득하여야 한다.

공(空)을 터득해야 한다.

다음으로 인과(因果)를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

얻은 것만큼 잃게 되고 사라진다는 것.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것만큼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과보(果報)를 받는다는

인과법(因果法)을 철저히 알고 믿음으로써,

좋아하는 욕심을 없애고, 매사에 초연한 마음으로 항상 평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아상(我相)을 벗어나야 주어도 주는 것에 머물지 않고,

주는 물건에 머물지 않고, 받는 대상에 머물지 않게 된다.

따라서 시비가 생기지 않고,

질투와 투쟁심이 생기지 않고,

나와 남이라는 분별이 없으므로 매사에 있어서 거친 마음이 동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sansng@hanmail.net

[1625호 / 2022년 3월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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