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이야기

- 8.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 진여의 이치를 실상으로 봄)

수선화17 2023. 1. 15. 23:58

- 8.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 진여의 이치를 실상으로 봄)

 

여래의 몸 완벽하게 구족됐더라도 그 몸으로는 여래 볼 수 없어

몸이 32상 80종호 성스러움 갖췄더라도 생로병사는 면치 못해

인연에 따라 생긴 색신은 실다움 없는 물거품과 같아 허망무실

진정한 법신의 여래는 항상 머물러 변함이 없고 다함 또한 없어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신상 견여래부(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의 몸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신상(身相)이란 색신(色身)을 말한다.

즉, 세존의 몸을 가리키니 4대 색신은 지수화풍(地水火風-흙, 물, 불, 바람)으로 만들어진 몸이다.

우리의 몸 역시 4대 색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죽음에 이르면 살과 뼈, 가죽, 손발톱, 터럭, 이빨, 때 등은 흙으로 돌아가고,

눈물, 콧물, 침, 정액, 오줌, 피 등은 물로 돌아가며, 더운 기운은 불로 돌아가고,

운동하는 기운은 바람으로 돌아가니,

지수화풍 4대로 된 것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부처님께서는 32가지 상(相)과 80가지 좋으신 몸의 모양을 가지셨다.

32상 80종호(種好)라고 한다.

쉽게 말해서 몸은 단정하시고 금색광명이 빛나시며,

눈빛은 별과 같이 밝고 깨끗하시고, 음성은 멀고 가까움 없이 들리는 것 등,

서른두 가지의 모양을 완벽히 지니셨고,

여든 가지의 결점이 하나도 없으신 색신을 완벽하게 구족하셨다.

 

제자들로서는 자신들의 누추한 신상에 비해 너무나도 완벽하신 부처님을 흠모하고

공경하는 마음과, 존경하고 찬탄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자 마침 부처님께서 상(相)에 머물지 아니한 복덕이

무량(無量)함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마음속으로

“무량복덕이란 저렇게 구족원만하신 부처님의 상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이를 아시고 이 뜻을 밝히시려 수보리를 불러 물으셨다.

“네 뜻이 어떠하느냐? 나는 소위 너희들이 일컫는 여래이니라.

그렇다면 여래라는 뜻은 어디선가 왔을 것이며,

지금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있을 것이며,

여여(如如)하고 완벽함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내 신상의 몸으로서 여래라고 부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옳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보느냐?”

 

이렇게 물으시고, 만약 여래의 색신을 보고 복덕이 구족하다고 생각하거나

나의 색신을 보고 상에 머무른다면 결코 복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셨다.

동시에 이는 색에 머무르는 생각에 지나지 않으니 옳은 생각이 아니라고 일깨워 주셨다.

부처님의 색신을 보고도 부러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색신 역시 생로병사를 면치 못하고

허망함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더라도 이는 인과(因果)의 모습이요,

생로병사의 모습이며, 지수화풍 4대의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분별없는 평안한 마음이 된다는 것을 잘 알아서 항상 초연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보통 사람을 상대할 때 일단 나와 다른 너로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몸을 보면서

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보고 듣고 이해하며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규정짓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상대방 또는 각각의 사람을 연상하면서 상대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 상대는 번개와 같이 사라지게 되고 지수화풍 4대로 돌아가는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결국에는 그 사람을 연상하면서

그 사람의 말과 생각과 감정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나의 생각만 남을 뿐이다.

나의 몸이나 상대의 몸이나 때가 되면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몸은 사라져도 나의 생각과 감정은 남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과(因果) 인연(因緣)으로 인하여 육도(六道-천상, 인간, 수라, 지옥, 아귀, 축생) 가운데

어느 한곳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비록 지금의 몸과는 전혀 다르게 태어나겠지만,

생각과 감정의 업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생각과 감정의 업에 의해 지금 인연들과 비슷한 상대들이 또 나타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과 감정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은 완전히 나와 별개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감정의 업에 따라서 나타나는 나의 모습, 나의 아바타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두 내 마음이 만든다)요,

만법유식(萬法唯識-모든 것은 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이라 한다.

따라서 나의 생각과 감정의 업이 달라지지 않는 한,

지금 대하는 사람들과 유사한 사람들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게 될 것이고 반복하며 나타나게 될 것이다.

참고로 부처님은 업이 없으므로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분별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업식 가운데 분별이 없으므로, 모두가 무분별하고 평등한 사람들만 인연될 뿐이다.

 

그러므로 첫째 내가 보는 상대의 몸은 지수화풍 사대에 불과한 것이요,

둘째, 따라서 내가 보는 상대의 몸은, 따로 상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나의 생각과 감정의 업이 거울처럼 비쳐서 나타난 나의 업식의 그림자,

또는 아바타로 생각해야 한다.

더구나 부처님의 32상 80종호의 몸조차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니,

사대색신(四大色身)과 공함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 32상 80종호를 본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렇게 보는 나의 생각과 감정의 업식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야세존 불가이신상 득견여래 하이고 여래소설신상 즉비신상

(不也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몸이 여래의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보리는 세존께서 물어보신 뜻을 알았다.

그러하여 수보리는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지금 여래의 신상은 아무리 서른두 가지의 상을 갖추시고

여든 가지의 좋은 모양을 지니셨다 하더라도, 이는 사대색신에 불과하여 결

국에는 늙고 죽고 썩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여래의 몸도 우리 범부와 다르지 않으므로,

지(地)는 흙으로 돌아가고 수(水)는 물로 돌아가고

화(火)는 불로 돌아가고 풍(風)은 바람으로 돌아갈지니,

이러한 색신(色身)을 여래라고 보는 것은 대단히 옳은 생각이 아니옵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왜 그러할까? 여래라는 뜻은 그대로 변함이 없고 중생을 위하여 나타나셨으나,

나타남이 나타난 것이 아닐지니, 무너지는 몸이 아니고, 늙는 몸이 아니며,

병드는 몸이 아니고, 죽는 몸이 아니며, 썩는 몸이 아니고, 더러운 음식을 먹고 사는 몸이 아니며,

이는 항상 머무는 몸이시고, 생(生)이 없으므로 멸(滅)도 없는 몸이시며,

늙고 아픔이 없는 몸이시고, 죽고 썩음이 없는 몸이시며,

다함이 없는 실상법(實相法)의 몸이시고, 금강(金剛)의 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항상 머물러 변함이 없으시고,

다함이 없는 법신의 여래이거늘,

연(緣)으로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는 색신,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의 색신, 허위이고 실이 아닌 무상이요,

순간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색신에 비유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러할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신상(身相)은 허망하고 실다움 없음이 물거품과 같고 찰나이며,

항상하지 않음이 번개와 같기에 이런 까닭으로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의 신상이 곧 신상이 아니옵니다 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세존의 몸이 곧 신상(身相)이 아니라는 것을 왜 다시 밝히시는 것일까?

신상이란 결코 영원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즉시,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마는 허망무실한 것이다.

물거품의 인연이 다하면 찾을 수 없고 이름만이 전해질 뿐이다.

 

물에 의해 거품이 일어날 뿐이지 거품이 물은 아니다.

그러므로 물의 거품이 거품이 아니요, 바람은 바람일 따름이지 거품은 아니다.

거품의 본래 고향은 물과 바람이듯이, 신상의 몸은 신상의 몸이 아니라

본래 지수화풍 사대가 인연에 따라 화합함에 있어 거짓이름으로 신상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상(身相)이 인연이 다한 다음에는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지수화풍은 지수화풍일 따름이지, 신상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의 몸을 진짜 몸으로 집착하여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면,

그에 따른 인과가 생기게 되고 또한 몸으로 인한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된다.

하물며 지수화풍 사대 역시 신상(身相)이 물거품인 것과 같이 허망하여 실재가 없다.

지수화풍의 실재 모습은 요즘말로 분자와 원자에 속한다.

물론 분자와 원자까지도 실상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일단 공성(空性)이라는 가칭을 붙여주었다.

 

신상의 몸이 되었든, 지수화풍 사대가 되었든 이러한 실상은 번갯불과 같이 빠르다.

그러나 저 번갯불이 말이 번개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것이어서

사실 있다고 할 수도 없으니, 우리의 신상의 몸 역시 번갯불과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번갯불과 일생일대를 사는 신상의 몸을 같이 볼 것인가?

이는 신상에 애착하므로 허망과 찰나임을 깨닫지 못하는 까닭이다.

시간은 본래 공하다.

깨닫고 보면 길고 짧은 것이 없다.

다만, 일생이라는 시간을 느끼는 것은 즐겁고 괴로운 고락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하루살이나 찰나 간에 생멸이 오고 가는 미균(세균) 등의 짧은 생을 살아가는 중생이나,

수 억겁을 살아가는 제천(諸天)의 중생까지도 번갯불같이 찰나와 순간의 시간일 뿐이다.

각자가 살아가는 모습은 결국 즐겁고 괴로운 고락(苦樂)의 업이 있기 때문이니,

애착의 정도에 따라 살아가는 시간이 짧고 길게 느낄 뿐이다.

능히 이렇게 번개와 같이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는 안목을 잘 갖추어서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신상의 몸에 집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달관의 경지에 도달하여 마음을 제대로 제도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할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sansng@hanmail.net

[1629호 / 2022년 4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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