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정신희유분(正信稀有分 - 바른 믿음은 희유함) -
(진우 스님의 금강경 강설)
- 13. 정신희유분(正信稀有分 - 바른 믿음은 희유함) -
좋다 싫다는 분별 버리고, 분별 버렸다는 그 마음까지 다 버려야
상 없앴다는 생각 남아있으면 그것이 다시 상이 돼 다시 윤회
배를 타고 강 건너놓고 배가 고마워 배를 버리지 못함과 같아
더러움에 머물지 말고 청정함에도 머물지 말아야 해탈도 가능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 착아인중생수자 약취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하이고
약취비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시고 불응취법 불응취비법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 着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무슨 까닭이냐 하면 이 모든 중생들이 마음에 모양을 지닌다면 곧 나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오래 산다는 생각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라는 모양의 생각을 가져도 곧 나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오래 산다는 생각에 다시 빠져들기 때문이다.
만일 법 아니라는 생각을 지닌다 하여도 이 또한 곧 나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오래 산다는 생각에 빠져들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법도 지니지 말고, 마땅히 법 아닌 것도 지니지 말지니라.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사상(四相)과 법상(法相)과 비법상(非法相)이
모두 없어야 무량복덕을 받을 수 있는가?
중생이 마음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거나
또는, 이러한 사상이 없다는 상마저도 취하게 된다면,
이는 또다시 사상에 도로 주저앉게 되는 것이어서 깨끗한 믿음이라 할 수 없으니,
곧 여래가 나이고 내가 여래인 무량복덕을 받을 수 없음이다.
왜 그럴까? 이렇게 무량하고 깨끗한 믿음의 복덕성품(福德性品)에는
청정한 마음의 깨달음이 아니고는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다.
또 이에 한층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사상이 없고,
사상이 없다는 상까지 없는 무법의 법상까지 없다는 상을 또 취하게 되면
이 또한 사상에 도로 머무르게 되는 것이므로 깨끗한 믿음이라 할 수 없음이니,
여래라는 무량복덕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왜 또 그러하냐? 무량한 청정복덕(淸淨福德)에는
무상청정(無相淸淨)한 믿음의 깨달음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연유이다.
이 무슨 말이냐? 내 마음이 청정하여 무위무상(無爲無相)의 청정실상(淸淨實相)을 믿게 됨은,
내 마음이 모든 상을 무위무상의 청정실상이 되는 때인 까닭이다.
마음공부를 하는 수행자들은 일체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모든 오락 가무 음주를 금지한다.
왜냐하면 감정은 작거나 크거나 인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니,
즐거운 감정은 괴로운 감정을 낳고, 기쁜 감정은 슬픈 감정을 낳으며,
행복한 감정은 불행한 감정을 낳는다.
이를 사상(四相-아, 인, 중생, 수자)이라 하고 인과의 법칙이라 한다.
따라서 감정이란 사상의 뿌리라 할 수 있다.
오온(五蘊-색, 수, 상, 행, 식) 가운데 수온(受蘊)에 해당하며 수온은 고락사(苦樂捨-괴로움,
즐거움, 무감각)삼수(三受)의 감정 작용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런 감정이 하나 생기면 저런 반대의 감정 하나가 똑같이 생기게 되니,
이를 업보, 과보라고 한다.
사상을 여읜 상을 법상이라 했다.
법상마저 여읜 상을 비법상이라 했다.
그렇다면 비법상이면 끝일까?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본다 해도,
상 아닌 것으로 보는 법상이 생겼으니 비법상이 생길 수밖에 없고,
비법상이 생겼으니 이를 다시 비법상으로 보지 않는 비비법상이 생겨야 한다.
이는 다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되니, 도돌이표와 같다.
이 모든 것은 생각이라는 것에 머물러 또다시 생각하게 되므로 인과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네 삶이란 바로, 생각과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어서,
윤회할 수밖에 없으니, 이를 벗어나는 길은 상을 완전히 여의는 것이다.
하이고 약취비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만일 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깨닫는다 하여도 이 또한 곧 나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오래 산다는 생각에 빠진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니라.
그럼 사상에도 머물지 않으며 사상법에도 머물지 않으며 또 머물면 안 된다는
생각의 법상에도 착하지 않으면 일체법을 쓰지 않고 끊겨서 멸한 듯한 그곳,
즉 비법상을 취할 것인가? 이것이 무위무상의 청정실상인 그곳인가?
절대로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비법상이라도 취하게 되면,
도리어 아·인·중생·수자상에 머물게 되는 탓이니,
이는 사상이 없는 정신 즉, 깨끗한 마음이 못되므로 무량복덕을 받을 수 없다.
왜냐? 깨끗한 믿음이라는 깨끗함에는 사상을 떠난 법상으로서,
법상을 떠난 비법상까지도 용납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깨끗함에는 얼씬만 해도 사상이 되는 까닭이니,
이 깨끗함에는 집착함도 사상이 되고, 집착함을 떠남도 사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법상까지 여읜다면 어디로 가는 걸까? 내 마음이 청정하여 사상이 없으므로,
아이니, 인이니, 중생이니가 없고 또한 수자상의 득처까지 없을지라도,
[마음에 없다는 것을 알 때]에는 아직도 중생집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원하는 마음이 없어야 원하지 않는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상을 내면 이미 상을 내는 데 따른 과보를 받게 된다고 하신다.
그래서 노력과 정진을 통해 상을 없앴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이에게
부처님께서는 아직 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상을 떠났다고 하는 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법상이라는 상을 다시 떠나야 비법상이 된다고 했으나,
비법상이라는 상이 또다시 남아 있는 한, 사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하이고 약취비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만일 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깨닫는다 하여도 이 또한 곧 나다, 사람이다, 중생이다,
오래 산다는 생각에 빠진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니라.
비법상까지 여읜다면 어디로 가는 걸까? 내 마음이 청정하여 사상이 없으므로,
아이니, 인이니, 중생이니가 없고, 또한 수자상의 득처까지 없을지라도,
[마음에 없다는 것을 알 때]에는 이미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생기므로
이 또한 중생집(衆生執)을 면치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왜 그러냐? 이것은 청정심(淸淨心)과 청정을 깨닫는 마음이 이미 둘이 되었으니
아상, 인상이요, 따라서 청정이 있으매 비청정이 생겼으므로 중생상이 되었고,
또 청정을 얻은 것으로 하여 마음을 깨달았다는 열반처를 느낄지니 수자상이 된다.
따라서 이는 아무리 깨달음을 알았다 하더라도 중생분별계에서 노는 것이므로
중생집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또 능히 중생집을 떼어내서 중생분별계를 떠났다 하더라도,
떠났다라고 하는 법상이 오히려 남는 것이므로 또 법집(法執)을 면할 수 없다.
그러하여 법상과 비법상이 모두가 법집에 속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법집 중에서 법상 비법상을 어떻게 분별하게 되는 것일까?
법상은 중생분별계를 떠났을지라도 오히려 지키던 법,
가졌던 법은 모두 분별계(分別界)를 여의었다 할지라도,
또다시 얻었다 하는 법은 남아 있을 것이다.
일체의 분별은 이제 없다 할지라도, 법 하나는 가지고 놓지 못할 것이니,
이것을 법상의 법집이라고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넜을지라도
이 배가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해준 것만을 생각하고 차마 배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법상이라는 것에 집착하게 되면 다시 사상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법에 걸림이 있으면 법에 걸려 있는 놈도 있을 것이니 걸러진 놈은 아상이요,
법은 인상이 된다.
또 정법이라는 것에 집착하는 고로, 이미 정법이 있게 되면 사법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니 중생상이 된다.
또 사상을 떠나야 정법이 된다고 한다면 이미 정법이라는 법상의 분별이 생기므로,
사법(邪法) 또는 비법상이라는 상이 또 생기게 되고,
이러한 정법과 비법상(非法相)이 최고의 깨달음이라 하고
만고불변의 대진리라고 하게 된다면 이를 수자상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법상이 아무리 사상을 여읜다 하더라도 법집에 불과하게 되고
이것이 법집이 속한 법상이 되는 것이다.
목소리만 들어도 싫은 사람이 있다.
절대로 보고 싶지 않고 근처에 있는 것조차 짜증 나고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사람이 있다.
물론 정도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누구나 이런 사람이 한 둘은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알지 못하면 밉거나 싫은 사람은 계속 나타나게 될 것이고,
죽어서 다음 생에 까지도 무수히 나타나고 또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면 근본원인은 과연 무엇이며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첫째는,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욕심 때문이다.
욕심은 왜 생긴다? 나 스스로 괴롭지 않고 즐겁기 위해 좋은 것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런 좋은 것에는 인과가 생겨서 좋은 것을 얻은 만큼 싫고 나쁜 것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과보다. 그러므로 상대가 잘못했기 때문에 싫고 미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겉으로 나타난 가짜 원인에 불과하다.
진짜 원인은? 즐겁고 좋은 것을 얻으려는 욕심에 의한 과보로서,
싫고 괴로운 업이 나타날 때, 밉고 싫은 사람이 인연 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근본 원인은 밉고 싫은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좋은 것을 얻음으로 하여 나타나는 인과의 과보가 원인이다.
그러니 밉고 싫은 상대를 더욱 미워하고 싫어하게 된다면,
이는 지금의 상대보다 더한 밉고 싫은 상대가 계속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 있는 인과의 업인 밉고 싫은 마음의 상을 놓아야 한다.
바로 아상이요, 인상이요, 중생상이며, 수자상의 사상이다.
좋다는 상, 싫다는 상을 놓고, 이러한 분별된 상을 놓았다 하더라도
무엇을 놓았다고 하는 법상이 남아 있으면 법집에 불과한 집착이다.
또 법상을 여의었다 하여 비법상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상이 생기게 되면,
이 또한 비법상에 머물게 되는 법집이 된다.
그러므로 밉다는 생각, 미운 사람, 밉다는 생각까지 버려야지 하는 생각,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미운 상대, 미운 상대를 밉다고 하는 생각까지 버려야지 하는 생각,
이렇게 버려야지 하는 생각까지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조차도 없어져야,
다시는 밉다 싫다는 생각이 재발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
그리하여 모두를 놓아버린 줄 아는 그곳까지 정진해야 할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교육원장 sansng@hanmail.net
[1640호 / 2022년 7월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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