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 무위 복의 수승함 ) -
(진우 스님의 금강경 강설)
- 25.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 – 무위 복의 수승함 ) -
진정한 기도란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를 여법하게 잘 아는 것
사구게 한 게송만이라도 깨달아 제도하는 것이 가장 큰 복덕
싫다 좋다를 분별하지 말고 집착 또한 벗어나야 성불도 가능
괴로움은 필연이니, 이에 대한 해결로 마음공부·수행 꼭 필요
불고 수보리 약선남자선녀인 어차경중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이차복덕 승전복덕
(佛告 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네 글귀로 된 한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알려준다면
그 복덕이야 말로 앞에서 말한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더 나으리라.”
부처님께서는 수보리가 “심히 많습니다”라고 한 말을 듣고 이에 대한 설명을 하셨다.
“그 누구라도 이 경의 네 가지의 경구 가운데 한 게송만이라도 믿고 지녀서,
그 묘리(妙理)를 잘 알아 마음을 청정히 한다면,
자신의 진여보제(眞如菩提)로 삼공묘지(三空妙智)에 부합하게 되고 대도(大道)를 이룰 것이니,
그 얻은바 공덕이야 말로 항하수(恒河水) 모래수 만큼의 모든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하는 것보다 그 복덕(福德)이 더욱 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큰 것이 있으니,
진공묘의(眞空妙義)에 능히 밝아서 남을 위해 설명하고 알아듣게 하여 자성을 밝혀 줌으로서,
생사의 언덕을 벗어나 열반의 피안(彼岸)에 이르게 한다면
이 사람이야 말로 자리리타(自利利他)를 겸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 복덕이야 말로 무위(無爲)의 복덕이므로,
그 얻는바 이익이 어찌 항하의 모래수 같은 삼천대천세계의 칠보(七寶)로
보시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칠보의 보시는 아무리 많이 한다 해도 유위법(有爲法),
무루법(無漏法)인 물질보시(布施)에 불과할 것이요,
또 아무리 대도(大道)를 알았다 하더라도 자기 혼자만 소화하고 남에게 이르지 못한다면,
이 역시 소승법(小乘法)을 면치 못할 것이요,
자타(自他)를 정복하여 자타를 살리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능히 하나의 사구게(四句偈)라 할지라도 무위법(無爲法),
무루법(無漏法)의 진여진리(眞如眞理)가 실려 있는 무상법보시(無相法布施)가 되는 것이므로,
다함이 있는 유위(有爲)의 한계를 능히 벗어날 것이다.
최고의 기도는 무엇인가?
최고의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기도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부처님이나 신장(神將) 등께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정성이란 일반적으로 물질적인 것을 포함하여 마음을 오롯이 모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정성(精誠)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이다.
이는 인과(因果) 인연에 따라 어느 정도 성취할 수는 있으나,
성취에 따른 즐거움과 기쁨, 행복은 인과의 과보가 따르게 되므로,
그만큼의 불행과 괴로움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결과적으로는 속된 말로 본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정한 기도란 무엇일까?
진리를 여법히 알고 체득하여 전법회향(傳法廻向)하는 것이다.
진리란 부처님과 부처님 말씀인 법,
그리고 이를 실행하는 이들인 수행자 즉,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여실히 믿고 공경하며 호지(護持-감싸 지님)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진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인 경전을 말하는데,
그 가운데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 등이 있다.
게송(偈頌)의 공통된 뜻은 좋다 싫다의 고락(苦樂)을 분별(分別)하지 않고,
마음을 머물게 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 때, 하늘신과 인간, 수라,
그리고 천룡팔부의 신장이 감복하여 공경하고 공양하게 된다.
따라서 기도의 처소인 법당(法堂)과,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의 형상 등은 곧,
부처님의 진리를 가상(假像)한 모습으로 꾸민 도량으로서,
이는 곧 부처님의 불(佛)과, 부처님의 진리인 법(法)이 담겨져 있는 고로,
불법(佛法)을 오롯이 수지(受持) 독송(讀誦)하는 나와 수행자(스님)들을 승(僧)으로 보아,
이를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란, 부처님의 진리를 여법(如法)히 잘 아는 것이고,
진리를 체득하려면 분별하지 않는 참선의 마음을 가져야 하며,
참다운 참선의 마음을 갖추려면, 탐진치(貪嗔痴-탐욕,성냄,분별) 삼독심(三毒心)을 버리고,
어떠한 선연(善緣)과 악연(惡緣)이 닥치더라도 마음이 머물러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잘못 쓴 대가인 인과에 걸려 업보(業報)와 과보(果報)를 받아야 하므로,
고통과 괴로움이 항상 따르게 되니, 육도(六道) 윤회(輪廻)를 면치 못하게 된다.
그러니 진정한 기도와 참선의 마음,
그리고 괴로운 마음을 비우기 위한 보시를 늘 멈추지 말고 정진해야 한다.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 - 바른 가르침을 존중함)
부차 수보리 수설시경 내지 사구게등 당지차처 일체세간 천인 아수라 개응공양 여불탑묘
(復次 須菩提 隨說是經 乃至 四句偈等 當知此處 一切世間 天人 阿修羅 皆應供養 如佛塔廟)
하황유인 진능수지독송(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또 수보리야! 어디에서나 이 경을 설할 때
네 글귀로 된 사구게의 한 게송만이라도 마땅히 알지니라.
이에 대해 일체 세간의 천상, 인간, 아수라들이 모두다 마땅히 공경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 할 것이거늘,
하물며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워서 능히 더 잘 안다면 말할 것이 있겠느냐.”
하늘·사람·아수라는 천취(天趣), 인취(人趣), 아수라취(阿修羅趣)이니
세간(世間)에 사는 중생의 업보(業報)를 여섯 갈래로 나뉜 것이니,
이를 삼선도(三善道)라 하고, 지옥취(地獄趣), 아귀취(餓鬼趣),
축생취(丑生趣)의 삼악도(三惡道)를 더하여 육도(六道)라 한다.
여기서 삼악도(三惡道)를 말하지 않은 것은 죄가 중하고,
지혜가 박약하여 반야(般若)의 묘법(妙法)을 알아듣지 못하는 까닭이다.
탑(塔)은 불사리(佛舍利)를 모신 뜻이고, 묘(廟)는 부처님의 형상을 모신 법당(法堂)을 말한다.
사구게(四句偈) 가운데 한 게송(偈頌) 만이라도 능히 그 뜻을 깨달아 나와 남을 제도한다면,
이는 항하(恒河)의 모래 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칠보(七寶)를
가득채워 보시(布施)하는 것보다 더욱 복덕(福德)이 수승하다 하였다.
그러므로 천상과 사람, 아수라 등이 공경하기를
불탑(佛塔)과 법당(法堂)에 공양하듯 한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탑과 법당이 귀중한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님의 법(法)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라 함은 형상과 사리를 이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사구게(四句偈)가 귀중한 것이 아니다.
사구게에 담긴 진리가 귀중한 것이다.
진리가 있으면 그 자체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계시면 천(天)·인(人)·아수라가 응당 부처님(진리)이 계신 탑묘(塔廟)를 공경하며
청법(聽法)하고 호법(護法)할 것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진리를 능히 알고 제도한다면,
어떤 이가 곧 법(法)이요, 불(佛)이며, 무주무상(無住無相)의 보리법(菩提法)일 것이다.
이러한 경을 설하는 장소가 있다면 이곳이 바로 진리가 있으므로,
천룡팔부(天龍八部)가 공경하고 공양하거늘, 심(心)이면 곧 부처요,
구(口-설법)이면 곧 법(法)이요, 심구상응(心口相應)이면 곧 승(僧)이니,
이러한 삼보(三寶)야 말로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온 나라가 마비된 듯하다.
아니 온 세계가 패닉 상태다.
2차 세계 전쟁 이후 이렇게 전 세계 모든 국가가 하나같이 힘든 경우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역시 97년 IMF와 2008년 금융위기에 버금갈 정도로 사회와 경제가 매우 힘들다.
자연이나 사회나 개인이나 위기는 항상 온다.
연기(緣起)현상의 시절인연(時節因緣)이요, 인과(因果)작용이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습과 마음의 모양은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를 대하는 감정이다.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필연(必然)이다.
당연한 결과라는 말이다.
다만 그 원인을 정확히 모를 뿐이다.
그러니 겸허히 받아들이는 방법 이외는 없다.
누구나 늙고 병들고 언젠가는 사라진다.
너무나 당연한 소치겠지만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마음이 다르다.
오고가는 필연적 연기(緣起) 현상을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일 줄 아는 이는 그래도
덜 힘들겠지만, 억울하다거나 슬프고 힘들게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은 매우 괴롭다.
이와 같이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인과(因果)의 인연 소치로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를 갖추려면 평소에 훈련과 마음수행이 꼭 필요하다.
적어도 인생만사(人生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것만이라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좀 더 품덕(品德)을 갖추려면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분별심(分別心)에 의해 좋은 일,
나쁜 일의 인과(因果)가 생겨난다는 것을 체득해야 한다.
어떤 경우이든 고통과 괴로운 일이 생기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 아닌 필연(必然)이다.
어찌되었든 내가 희락(喜樂)의 즐거움을 맛본 만큼, 딱 그만큼의 과보로 다가가는 것이다.
의심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법이다.
그러니 이러쿵저러쿵 마음 써봐야 속만 상한다.
고락(苦樂)의 감정과 세상은 우연과, 운과, 재수와, 요행과, 로또는 없다.
결과적으로 인과(因果)가 윤회하는 시절인연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금강경’ 사구게(四句偈)를 완벽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삼보를 호지(護持)해야 한다.
조금 어렵고 힘들더라도 마음공부와 수행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 재미가 있고 없고를 따져서는 안 된다.
그래야 눈물 흘릴 일이 없을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665호 / 2023년 1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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