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이야기

- 27.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 법답게 받아 지님) -

수선화17 2023. 3. 13. 23:28

(진우 스님의 금강경 강설)

- 27.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 - 법답게 받아 지님) -

 

마음도 거울과 같으니 있는 그대로 비추어 시비고락 하지 말라

좋고 나쁨은 분별이며 분별은 인과 낳고 인과는 고락의 연속

인과가 본질이니 시비와 고락‧선악 등 분별에 머물지 않아야

분별된 생각 없으면 진짜 무소유인 유무 떠난 중도의 마음 돼

 

소이자하 수보리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所以者何 須菩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무슨 까닭이냐 하면 수보리야! 부처님이 반야바라밀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이 ‘금강경’은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말을 하고 이름을 붙이는 즉시 이러쿵저러쿵 상(相)이 생기기 때문이고,

이것이라고 하면 저것이 생겨서 인과(因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으니,

중생을 알아듣게 하기 위하여 거짓 이름을 세웠으니 바로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단지 이름뿐임을 명심하여 절대로 상(相)을 내지 말고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

또 말과 생각을 하지 않는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뜻을 합(合)해야 할 것이며,

좋다 싫다는 분별(分別) 망상(妄想)을 부려서는 안 된다.

 

만약 가히 얻을 ‘금강반야바라밀’이 있다면 이는 이미 정하는 법이 되어

생기지도 않으므로 사라지지도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금강지가 아닌 것이다.

또 만약 이름을 붙일 ‘금강반야바라밀경’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벌써 이름에 상(相)이 붙게 됨이요,

완전히 남음이 없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의 피안(彼岸)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금강반야바라밀’을 얻었다고 한다면,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줄 알고 난 연후일 것이니,

‘금강반야바라밀’이 어느 곳에 있을 것이며, 이름이 어찌 붙을 것인가.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면 이름자를 여의고 본래의 성품이 밝게 비칠 때,

영혼이 밝고 밝은 영명(靈明)이 되므로,

거짓 이름을 억지로 붙여서 진정한 ‘금강반야바라밀’ 이라는 것이다.

 

또 분별(分別)이 없는 본 성품에 이르러 묘(妙)하게 응하고 비지 아니하여서,

억지로 이름 하여 ‘금강반야바라밀’ 이라는 것이며, 고요를 즐기는 담적(湛寂)이 되니,

억지로 이름하여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고, 본 성품에 이르러 걸림이 없고

자재(自在)하여 억지로 이름 붙여서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이다.

 

언쟁(言爭)을 할 때가 많다.

언쟁이란 말로 다투는 말다툼이다.

나의 주장과 상대의 주장이 서로 어긋나서 각자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쟁투하는 것이다.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왜 이기려고 하는 것일까? 당연히 나의 주장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니 옳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설사 옳지 않더라도 고집을 부리고 억지를 부려서 까지 이기고 싶어 한다.

상대를 이기는 것이 나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유리하다고 생각할까?

물론 이기면 기분이 좋고 지면 기분이 나쁘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고 나쁜 것과 상관이 없다면 굳이 고집하여 이기려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현상은 결국 기분이 좋고 나쁨의 문제이다 하겠다.

 

그러나 기분이 좋고 나쁨은 분별(分別)이다.

분별은 인과(因果)를 낳는다.

인과(因果)는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연속이다.

즉 즐거움에 따른 괴로움의 과보(果報)를 받는다.

 

그러므로 기분이 좋으면 기분 나쁜 과보(果報)를 받게 된다.

밀물이 들어올 때가 있으면 썰물이 나갈 때가 있는 것과 같다.

들어오고 나감에 단 1미리의 차이도 없다.

기분이 좋고 나쁜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도 이와 같다.

 

그러니 기분이 좋은 때가 있으면 기분이 나쁜 때가 반드시 있게 되는데,

이를 과보(果報)라 하고 시절인연이라고 했다.

따라서 만약 언쟁을 통해 설사 내 주장이 관철되어 기분이 좋았다면,

그 과보(果報)로 인하여 기분이 나쁜 시절인연이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때문에 사실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기분이 좋고 나쁜 인과(因果)가 진짜 본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시비(是非)와 고락(苦樂), 선악(善惡)과 정의(正義)와 불의(不義),

등의 분별(分別)에 머물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 신신당부하셨다.

 

따라서 결국은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감정에 의한 인과(因果)가 문제의 본질이니 만큼,

언쟁이든 주장이든,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어떤 경우이든 기분에 의한 분별(分別)을 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기분이 좋은 만큼 기분이 나쁜 과보(果報)를 언젠가는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니 아래의 ‘금강경’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의 해설과 같이,

거울은 항상 밝고 여여(如如)하게 만상(萬象)을 있는 그대로 비치듯,

마음도 거울과 같이 있는 그대로 비치고 받아들일 뿐,

시비고락(是非苦樂)을 하지 않아야 하거니,

오만(五萬) 상(相)에 대해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이며, 무슨 시비(是非)가 있을 것인가.

 

언쟁을 하더라도 또는 이기고 지더라도,

기분이 좋은 것에 집착하고 걸리지 말아야 할지니,

그렇다면 굳이 이기려 하거나 지지 않으려고 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하물며 세존께서 최고 최상의 금강반야바라밀 조차도

마음이 머물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 않으시던가.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유소설법부 수보리 백불언 세존 여래 무소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有所說法不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來 無所說)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법을 말한 바가 있겠느냐?”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아무것도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금강반야바라밀은 이렇듯 말을 할 수 없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경지라 했거늘,

만약 여래(如來)께서 ‘금강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는 대중이 있다면,

이는 법을 들을 줄 모르는 자의 생각일 것이다’고 하심이다.

이미 ‘금강반야바라밀이 언설(言說)과 이름을 여의었다’고 했다면,

이미 적나라한 본체가 드러났음이니,

이 자체가 여래지(如來地-여래가 머무는 땅)인지라 말과 이름이 없고 법(法)과

아상(我相)이 벌써 공(空)하였으므로, 무슨 말이 있을 것이며 무슨 법이 있을 것인가.

 

만약 말을 하고 이름을 붙인 것이라면, 대중을 위하여 거짓 법에 불과한 것이니,

이는 대중의 상(相)으로 세운 법이요, 대중들을 위한 말이니,

대중의 상(相)으로 생각하고 대중의 상(相)으로 말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굳이 마음으로 비유하자면,

밝은 거울에 비친 천태만상의 모습들은 거울이 만들어낸 것들이 아닌 것이요,

거울은 항상 밝은 거울일 뿐이니, 거울에는 일어나고 꺼짐이 없는 것이다.

마음도 거울과 같아서,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언정 거울은 항상 그대로 밝을 뿐이다.

 

그러므로 수보리는 이미 금강반야바라밀에 도달하였고,

피안(彼岸)을 건너 분별(分別)하지 않는 곳에 있는지라,

즉 불(佛)과 법(法)을 여실히 잘 알아서 불법(佛法)과 자신의 승(僧)을 포함해

삼보(三寶)를 하나로 실현한 까닭이다.

그런 연유로 수보리는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고 답을 한 것이다.

 

“주인공인 ‘바홈’은 ‘바시키르’ 마을에 가장 싼 땅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촌장을 찾아 1000루블을 지불하고,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걸어서

도달한 그 안의 땅을 모두 갖게 되는 계약‘을 하게 된다.

조건은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면 땅을 차지할 수 없도록 했다.

그는 조금이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하루 종일 먹지도, 쉬지도 않고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너무나 지쳐서 그 자리에 고꾸라져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그의 땅은 겨우 2평 남짓한 무덤뿐이었다.”

 

이 글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 소설 작품에 나온 내용이다.

설명을 돕기 위해 인용해 본 것이다.

 

사람들은 무조건 많이 차지하는 것을 원한다.

‘많다’라는 의미는 상대적인 마음의 관념이다.

‘많다’라는 것은 더 많은 것에 비해서는 항상 작은 것이 된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것도 더 많은 것에 비해서는 많은 것이 되지 못한다.

 

누구나 대부분 부자 되기를 원한다.

자기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이에 대해 부러운 마음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재산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은 모두 해당된다.

그러나 부자는 항상 스스로 부족하다.

본인보다 더 많은 부자를 쳐다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자라고 하여 더 많이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무소유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물질이나 명예를 무조건 갖지 않는 것만이 무소유가 아니다.

‘많다 작다’ ‘좋다 싫다’라는 분별심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무소유다.

거꾸로, ‘나는 거지로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면

이는 ‘아무 것도 갖지 말아야지’ 하는 분별심을 소유하는 꼴이므로,

이는 진정한 무소유가 아니다.

 

‘있고 없고’는 연기와 인과에 따라 올 때 오고 갈 때 가는 것이다.

‘있다 없다’라는 분별된 생각을 갖지 않으면 유무를 떠난 중도의 마음이 된다.

이를 진짜 무소유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차지하려고 하는 소유심도 큰 문제지만,

굳이 갖지 않아야 한다는 분별심 역시 이에 못지않게 경계해야 한다.

 

마음이 머물러 집착하는 것은 인과에 걸려서 결국은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저 인연 연기에 맡기고 ‘있고 없고’에 대해 분별하지 않고

그러한 마음을 소유하지 않고 무소유 하면 되는 것이다.

 

중생으로서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고 인과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의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절대로 고통과 괴로움을 비켜갈 수 없다.

생각이나 감정으로 해결될 문제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각을 완전히 전환시켜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실천하는 단계까지는 접어들어야 한다.

아직도 이러쿵저러쿵 생각만으로 잔머리를 써서는 수미산의 초입에도 도달치 못한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669호 / 2023년 2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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