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보살은 허공을 보지 않는다 -
[용하스님의 열반경 이야기]
- <36> 보살은 허공을 보지 않는다 -
볼 수 없음을 본다
허공이란 ‘물질의 없음’도 아니고
개념상 허공 자체도 부정하는 것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대열반의 미묘한 경전을 닦으면 허공을 보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부처님과 보살은 비록 다섯 가지 눈(五眼: 육안, 천안, 법안, 혜안, 불안)이 있지만,
허공을 보지 않는다.
오직 혜안으로 허공을 능히 본다고 하는데, 혜안이 보는 것은 ‘볼 수 없음’을 보는 것이다.
만약 물질이 없는 것을 허공이라 이름한다면,
이 허공은 곧 실상이라 이름할 수 있으니,
실상이므로 항상함이 없다고 이름하며,
항상함이 없으므로 즐거움도 나도 깨끗함도 없다.
선남자야, 공은 법이 없음을 이름한 것이며, 법이 없음은 공을 이름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세간에서 물질이 없음을 공이라고 이름하듯이,
허공의 성품도 이와 같아서 아무것도 없으므로 허공이라 이름한다.
중생의 성품도 허공의 성품과 같아서 그 성품에 실상이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예컨대 어떤 사람이 ‘물질을 제거하면, 허공을 이룬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말이니 허공은 실로 작위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허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까닭이니,
아무것도 없으므로 허공마저 없는 것이 곧 허공의 성품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만들 수 있다면 곧 항상하지 않다고 할 것이니,
무상하다면 허공이라 이름하지 못한다.
선남자야,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은 색도 없고 막힘도 없고 변화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고,
그런 이유로 허공의 성질을 제5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로 허공은 아무것도 없음을 성품으로 하며,
광명이 비춤으로 인해서 허공이라 하는 이름을 얻은 것일 뿐, 실제 허공은 없다.
마치 세상법은 실로 제 성품이 없지만, 중생을 위하여 세상법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열반의 체(體)도 그와 같아서 머무는 곳이 없고,
오직 모든 부처님의 번뇌를 끊은 곳이므로 열반이라고 이름한다.
열반은 곧 항상하고 즐겁고 참나이고 깨끗함이다.
열반의 즐거움은 우리가 감각하는 즐거움이 아니며, 가장 묘하고 적멸한 즐거움이다.
부처님 여래께 두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첫째는 적멸의 즐거움이요, 둘째는 깨달아 아는 즐거움이다.
실상의 체에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첫째는 감각하는 즐거움이며, 둘째는 적멸한 즐거움이며, 셋째는 깨달아 아는 즐거움이다.
불성에는 오직 한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마땅히 보아서 무상지혜를 얻는 것이며,
보리의 즐거움(菩提樂)이라고 이름한다.”
-<대반열반경> 제25권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에서
부처님께서 허공을 들어 열반의 체성을 설명하신 대목이다.
물질적 환경 속에 생존하는 우리는 대기 속의 빈 공간을 보고
‘허공(虛空)’이란 개념을 떠올렸지만, 실상 허공이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물질의 없음”으로 인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허공이란 개념상 허공 자체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공이란 이름에 매몰되다 보면,
그것이 마치 실상이 있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려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허공이 ‘물질이 제거되어’ 이루는 것이 아니듯이,
열반 또한 부처님의 육신이 나고 없고에 좌우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문에서 보살이 대열반경을 닦아 허공을 보지 않으며,
오직 ‘볼 수 없음을 본다’라고 한 것이다.
포천 정변지사 주지 용하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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