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이야기

- <2> 분별하는 마음 있으면 중생, 없으면 스스로가 부처 -

수선화17 2024. 2. 12. 21:46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신심명 강설]

- <2> 분별하는 마음 있으면 중생, 없으면 스스로가 부처 -

 

제1화 시절인연 따라 번갈아 나타나는 것은

➲ 본문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

지극히 도라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함을 싫어할 뿐이다.

 

➲ 강설

여기서 도라는 것은 중도를 뜻한다.

중도는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니 이는 분별하지 않는 마음을 가리킨다.

이것을 선택하면 저것이 생겨난다.

좋은 것을 선택하면 싫은 것이 나타나고 삶을 선택하면 죽음이 생겨나는 것이니,

오직 간택하고 선택하지만 않으면 바로 도 즉, 성불을 한다는 뜻이다.

 

분별하는 마음이 있으면 중생이고, 분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대로 부처이다.

그래서 도를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은 분별하는 마음만 없애면 되는 것이니,

이보다 더 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분별의 마음을 없앤다는 것은 이치로는 세수하다 코만지기보다 쉽게 생각되나,

현실적으로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부단한 정진을 통해 닦아 나가야 할 숙제라 할 것이다.

 

분별이란 과연 무엇일까? 한마디로 고락의 감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감정은 크게 나누어서 두 가지 종류라 하겠다.

좋은 감정과 싫은 감정, 즐거운 감정과 괴로운 감정,

기쁜 감정과 슬픈 감정, 행복한 감정과 불행한 감정인데 이것을 통틀어 고락이라고 한다.

말을 하면서도 고락의 감정이 생기고, 몸을 움직이면서도 고락의 감정이 일어나며,

생각을 하면서도 고락의 감정이 묻어 있다.

 

그런데 감정은 공식이 있다.

이를 인과의 법칙이라 한다.

한번 즐거우면 한번 괴롭게 되고,

100그램의 기쁜 감정을 느꼈으면 언젠가는 100그램의 슬픈 감정을 느끼게 되어 있다.

한번 태어나는 기쁨을 가졌으면 한번 죽어야 하는 슬픔의 감정을 느끼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지 고락의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모든 중생은 즐거운 감정과 기쁜 감정,

행복하고 기분 좋은 감정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움직인다.

또 괴로운 감정과 슬픈 감정, 불행하고 기분 나쁜 감정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움직이더라도 고락의 감정을 얻거나 피하려고 하는 행동이므로,

고락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든 선택하는 만큼의 인과가 생기므로

고락의 과보를 피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것을 고락의 분별이라 하고 또 고락의 윤회는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고 나쁜, 옳고 그른 시비 고락의 분별심은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네 싫네, 옳으네 그르네 하는 시비의 마음은

고락의 분별로 이어져서 고통과 괴로운 감정이 이어지게 되므로,

이를 벗어나는 길이 곧 중도의 길이고, 부처 되는 길이다.

 

따라서 일상의 생활에 있어서 즐거운 감정을 선택하려고 행동한다거나,

괴로운 감정을 피하려고 행동하는 것은 곧,

인과의 과보로 인해 계속적인 고통과 괴로움을 낳게 될 뿐이다.

절대로 싫다거나 좋다거나 하는 감정을 일으켜서는 안되는 것이니

참으로 난망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스님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고락의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수행하는 것이다.

 

때문에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한 탐진치 삼독심은 영원히 괴로움을 낳고 사는 중생의 마음이요,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한 선택을 하지 않는 이는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수행자라 하겠다. 결국 선택은 자기의 몫이다.

 

➲ 송(頌)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니니

좋은 것은 나쁜 것을 낳게 되고

나쁜 것은 좋은 것을 낳게 되나니

다만, 시절 인연에 따라

번갈아 나타난다.

 

제2화 사랑과 미움의 함수

➲ 본문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

다만 미움과 사랑을 그치면,

명백하고 당연히 통하리라.

 

➲ 강설

감정을 지니고 있는 중생을 유정(有情)이라 했다.

유정은 끊임없이 좋은 감정을 가지려고 하고 얻으려고 하는 업(業)으로 말미암아,

싫은 감정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게 된다고 하였다.

 

중생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싫고 괴로운 감정을 멀리하려 하며,

좋고 즐거운 감정을 얻으려 찰나 찰나 욕심을 부리게 된다.

하지만 좋고 즐거운 감정을 얻고자 하는데

방해되는 것이 나타나면 곧바로 화가 치밀어 오르고 성을 내게 된다.

 

참는 것 또한 더 괴로운 감정을 피하려는 작전상 후퇴의 방편이거나,

더 큰 즐거운 감정을 얻기 위한 수법의 일환에 불과하다.

참는다고 감정이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고통스러운 감정이 생기기 때문에,

배를 채워서 고통의 감정을 피하는 동시에 즐거운 감정을 가지려 한다.

따라서 이 두가지 상반된 감정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한 몸체인 것이다.

 

한쪽의 감정을 없애면 나머지 다른 또 한쪽의 감정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몸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고, 앞이 없으면 뒤 또한 없는 것과 같다.

인간과 모든 중생의 움직임은 이러한 좋은 감정을 가지려고 하는 동시에,

싫은 감정을 멀리하려는 의지가 있다.

이는 숙업(宿業-잠재의식)에서 나오는 행동들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작은 행동이나 큰 행동이나,

이 일을 하거나 저 일을 하거나, 좋은 일을 하거나 나쁜 일을 하거나,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문제는 작은 즐거움은 작은 괴로움의 과보(果報)를 낳고,

큰 기쁨은 큰 슬픔의 인과(因果)를 낳으며,

100그램의 행복은 100그램의 불행을 업보(業報)로 낳게 된다는 사실이다.

 

다만 각자의 업식(業識)에 따라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를 받는 시간이 다르게 된다.

어떤 이는 큰 슬픔의 업보(業報)를 받는 시간에 어떤 이는 큰 기쁨의 업보를 받고 있고,

어떤 이는 태어나는 즐거움의 업보를 받는데 비해

어떤 이는 죽어가는 업보를 받아 고통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처럼,

각자가 받는 고락(苦樂)의 감정을 받는 업보가 서로 다를 뿐이다.

 

그러니 이 두 가지의 감정이 모두 말끔히 사라져야 비로소

중도(中道)의 통연(洞然)에 들어서서 완전하고 명백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시간과 공간이 전혀 다른 극치의 어떤 곳에 도달하게 된다.

이를 피안(彼岸)이라 하기도 하고, 니르바나 즉 열반(涅槃)이라 하기도 한다.

 

부모 자식이나 가족, 친지, 친구, 이웃, 민족, 등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정(情)이란,

바로 나의 감정을 좋게 하기 위한 대상들에 불과하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 대로, 가족은 가족 대로,

고락(苦樂)의 업은 스스로 각자가 자업자득(自業自得)한다.

그러므로 만약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부모 자신의 감정을 좋게 하기 위해 자식이라는 대상을 선택했을 뿐이다.

 

어떻든 감정을 가진 중생은 감정의 프레임에 걸려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반복하여 거듭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육도(六道-천상, 인간, 수라, 지옥, 아귀, 축생)의 틀에서 벗어나려면

감정 자체를 없앨 수 있는 중도의 길을 찾아야 한다.

 

우선 그 길이란, 매사에 있어서 감정의 속성을 잊지 말고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연습과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고락(苦樂)의 인과(因果)에 대한 철저하고 확고한 믿음, 신심(信心)을

가지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버릇을 고치고서 여여(如如)한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무조건 좋고 나쁜, 그리고 옳고 그름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

바로 단막증애(但莫憎愛)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락(苦樂)과 증애(憎愛)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니,

마냥 중생의 삶에서 윤회고(輪廻苦)를 탈출하지 못한다.

그러니 반드시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의 힘을 빌려야 한다.

 

➲ 송(頌)

무조건 좋고 나쁜,

옳고 그름에 집착하면

고락(苦樂)과 증애(憎愛)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니

기도와 참선, 정진의 힘을

빌려야 하네.

 

[불교신문 3756호/2023년2월21일자]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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