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법(法)이란 더도 덜도 아닌 있는 그대로 그 자체” -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신심명 강설]
- <26> “법(法)이란 더도 덜도 아닌 있는 그대로 그 자체” -
제49화 지금 이 순간 허깨비에 홀렸다
본문
일여체현(一如體玄)
올이망연(兀爾忘緣)
체성의 바탕은 한결같이 현묘하니
이와같이 우뚝하여 차별 인연을 잊는다.
강설
체용론(體用論)의 체(體)는 바탕을 말하는 것이다.
이리 움직이든 저리 움직이든 아무 상관없이 본래 그 자리 그대로, 그 자체를 뜻한다.
하늘은 그대로인데 구름이 오고 간들 상관할 일이 아니다.
땅은 그대로인데 비바람치고 화산 폭발한들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구름이 낀다 해도 곧 사라질 것이고
바람이 분다 해도 부는 바람이 계속 불지 않는 것과 같이
온갖 생각과 감정이 일어났다 사라진다 해도 마음 바탕은 한결같이 그대로다.
이를 ‘현묘(玄妙)하다’ 한다.
그래서 오만가지 일이 일어나더라도
마음을 우뚝 세우기만 한다면 분별심(分別心)은 곧 사라지게 된다.
진정한 불제자라면 일어나는 모든 것을 허깨비와 같이 보아야 한다.
‘이렇게 꼭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저렇게 되는 과보(果報)를 받게 되므로 이런 생각을 그대로 놓고 비운다.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라고 하는 걱정은,
또다시 ‘저렇게 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과보로 연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마음 역시 그대로 놓고 비워 방하착(放下着)해야 한다.
생각대로 잘 된다면 기분은 좋을 것이다.
기분이 좋다는 것은 이미 인과(因果)의 틀에 걸리기 마련이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기분이 좋은 만큼의 기분 나쁜 일이 생기게 되므로
혹여 생각대로 된다 하더라도 과보(果報)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렇게 되면 절대 안되는데…’ 하고 걱정을 한다.
일이 잘 되어서 걱정을 한 만큼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인과(因果)의 과보(果報)로 인하여,
어떤 식으로든 일이 잘되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게 될 것이다.
반대로 걱정한대로 일이 잘되지 않는다면 기분이 매우 나빠질 것이다.
기분 나쁜 업(業)은 업장(業障)으로 쌓이게 된다.
이는 언젠가는 또다시 기분 나쁜 일이 반복되는 인과(因果) 윤회(輪廻)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어차피 인과(因果)의 그물에 걸리게 된다.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인과(因果) 인연에서 벗어나 집착하지 않고
미련을 두지 않으며 그대로 마음을 놓는다.
이것이 정답이다.
따라서 허깨비와 같고 그림자와 같은 현상에 마음을 끄달리지 말고,
‘이러면 안되는데…’ ‘저러면 되는데…’ 또는 ‘이렇게 되어야지...’
‘저렇게 되면 안되지…’ 하는 생각의 마음을 그대로 놓고 또 놓고 방하착(放下着)해야 한다.
탐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머리를 쓰지 않는 즉,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을 애초에 갖지 않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인과(因果)의 과보(果報)가 전혀 생기지 않기 때문에 가장 좋기는 하다.
하지만 적어도 일상을 살아가면서,
탐하고 성내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할 때, 설사 탐하였다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거나 미련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설사 화를 내고 성을 냈다 하더라도 성내고 화낸 것에 대해 집착하거나
미련을 갖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 쓸데없이 망상을 피웠다 하더라도 그 망상에 대해 더 이상 집착하거나,
미련을 갖지 말고 마음을 그대로 내려놓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할 것이다.
분별(分別)하지 않는 마음이 무엇보다 최우선이고,
설사 분별을 하더라도 더 이상 미련을 갖거나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인과(因果)에 대한 신심(信心)으로서 모든 것을 부처님 뜻(인과법, 공성)에 맡기고
걱정 근심하지 않으며, 늘 방하착(放下着)하여 마음을 그대로 내려놓고 또 놓아야 한다.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은 걱정 근심을 잠재우는 가장 수승한 최고의 방법이다.
송(頌)
‘이렇게 꼭 해야지’하는 마음을 놓아라.
‘저렇게 되면 안되는데…’ 하는 마음을 놓아라.
분별과 집착, 걱정 근심을 이 순간 놓아라.
모든 것은 허깨비 장난이기 때문이다.
제50화 오세동자 이야기에서
본문
만법제관(萬法齊觀)
귀복자연(歸復自然)
만법을 평등하게 본다면
본래 그러함으로 되돌아간다.
강설
만법(萬法)이란 모든 법(法)을 말한다.
또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일 뿐이니,
법(法)이란 더도 덜도 아닌 있는 그대로 그 자체를 말한다.
하늘은 그냥 푸르고, 바닷물은 그냥 출렁일 따름이다.
여름엔 뜨겁고 가을엔 낙엽이 진다.
그냥 그런 것이다.
사람의 말과 생각,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큰소리는 그냥 큰소리일 뿐이고 잡념은 그냥 잡념일 뿐이다.
거친 행동은 거친 행동일 따름이고,
조심스런 행동은 그냥 조심스런 행동일 따름이다.
다만, 이것은 좋고 저것은 싫으며, 이런 것은 기분 좋고 저런 것은 기분이 나쁘고,
이렇게 해야 행복하고 저렇게 하면 불행하다는 스스로 만들어 내는 기분과 감정이 문제다.
이렇게 고락(苦樂) 분별(分別)의 감정을 없앤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인과(因果)의 그물에 걸려서
울고불고 복잡한 마음의 번뇌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고락(苦樂-좋고 나쁜)의 분별 감정만 제거한다면 본래 바탕인 순수하고
평등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고락의 생사(生死)가 윤회하는 고통과 분노,
일체의 괴로움과 번뇌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설악산 오세암의 전설 오세동자 이야기가 있다.
겨울이 다가와 양식이 떨어지자 스님은 몇 일 먹을 양식을 챙겨서
다섯 살 먹은 동자를 남겨두고 탁발을 하러 마을로 내려왔다.
하지만 밤사이 큰 눈이 내려 도저히 올라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다가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절에 올라와 보니 오세동자가 방긋이 웃는 것이었다.
어찌 된 일인가 물었더니 흰옷을 입은 분이
매일 떡을 가져다줘서 맛있게 먹었다고 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관세음보살께서 돌봐 주신 것이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번 냉철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스님과 오세동자는 서로가 지닌 각자의 업(業)에 의해 행동을 한 것이다.
오세동자를 생각하는 스님은 스스로 만든 걱정과 근심,
그리고 안타까움의 고락(苦樂)이 있다.
물론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감정이다.
또 관세음보살이 돌봐 줄 것이라고 미리 예측하여 걱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오세동자는 동자 스스로의 업에 의해 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자는 관세음보살께서 돌봐 주지 않았다면
결국 굶주림으로 인해 배고픔의 고통을 받다가 죽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는 스님은 자신의 업에 의해 걱정을 하는 것이고,
동자는 동자의 업에 의해 천진난만하게 인과(因果)를 겪은 것이다.
동자는 동자의 업에 충실하여 스님이 걱정하는 것도 몰랐다.
또 동자가 분별하는 것은 단지 본능의 업에 따른 배고픔 뿐이었다.
그래서 이적이 일어나 관세음보살이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눈이 오지 않아서 스님의 돌봄에 의해 행복하게 지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또한 각자의 업에 의해 진행되는 것일 뿐이다.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는 계속 진행됐을 것이고,
과보(果報)를 받는 시간만 조금 달랐을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받는 것같아 보이지만
엄밀하게 보면 상대에게 영향을 받는 것 또한 자신의 몫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부모든 형제든 이웃이든,
누구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오롯이 나의 고락업(苦樂業)이 인과적(因果的)으로 작용하는 것일 뿐,
다른 대상에 의해 나의 업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했던 것이다.
고락에 대한 업의 인과는 어디까지나 각자가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분별하지 않으면 만법이 평등하여
본래의 바탕 자리로 돌아가게 되므로 모두가 비로자나불이 된다.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은 분별을 잠재우는 최고의 기술이다.
송(頌)
너를 걱정하는 것은 나의 업이요
나를 걱정하는 것은 너의 업이다.
너도 나의 업이요, 나도 나의 업이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불교신문 3782호/2023년8월22일자]
총무원장 진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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