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이야기

- 제50화 걸릴 것이 없는 맑은 마음 -

수선화17 2024. 8. 22. 22:33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증도가 강설]

 

- 제50화 걸릴 것이 없는 맑은 마음 -

강월조송풍취(江月照松風吹)

영야청소하소위(永夜淸何所爲)

강엔 달 비치고 소나무엔 바람 부니

긴긴 밤 맑은 하늘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강의

마치 어린이가 보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어딘가 좀 모자란 듯한 말과 같이 느껴지기도 하다.

 

소위 마음을 깨친 이들은 자연 현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이래서 좋고 저래서 싫다는 분별(分別)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니,

마음의 본체인 체(體)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객관 대상으로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두가 그림자로만 보일 뿐이어서 이를 용(用)이라 한다.

 

그림자를 보고 좋다 싫다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따라서 마음의 체(體)와 밖으로 드러난 현상인 용(用)이 따로 있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분별(分別)이 없으므로 눈으로 비치고 귀로 들리는 현상과 대상

또한 좋고 나쁜 분별(分別)이 없다는 뜻이다.

 

분별이 없으니 굳이 원하는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어서 다만,

주어진 인연에 순응하며 살 뿐이므로, 원하고 바라는 할 일이 무에 있겠는가.

긴긴 밤 맑은 하늘이란 바로 이 점을 표현한 것이니,

걸릴 것이 없는 맑은 마음이 한량없다는 뜻이다.

좋은 마음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나쁜 마음이 있기 마련이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나쁜 사람이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내 마음이 좋을 때는 예쁘게 보이지만,

내 마음이 좋지 않을 때는 밉게 보일 때가 그것이다.

 

묻지마 살인이 자주 발생한다.

아무 이유없이 사람을 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미국에서는 총기사용으로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기도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와, 교육, 환경, 가정, 등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간접적인 원인에 불과하다.

 

근본적인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사람은 각자가 즐겁고 괴로운 고락(苦樂)의 인과(因果) 업(業)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해하는 사람은 괴로운 마음의 고업(苦業)이 극단적으로 뭉쳐져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되는데, 바로 시절 인연이 도래한 것이다.

물론 이후에 나타날 감옥이나 사형에 따른 고업(苦業)도 연장선상에 있다.

 

죽임을 당하는 사람은 어떤가?

아무 죄없이 그야말로 억울하기 그지없는 경우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세상에는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것이다.

죽임을 당하는 사람 역시 고업(苦業)이 극도로 엉켜서

시절 인연의 현상으로 나타난 경우라 하겠다.

 

죽임을 당할 때의 공포와 고통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겠으나,

전생 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즐거움과 기쁨에 대한 인과(因果)가

한꺼번에 과보(果報)로 나타난 경우라 할 것이다.

즉, 전생과 지난 시절, 즐거운 낙업(樂業)이 나타난 때에 비례하여

엄청나게 괴로운 고업(苦業)이 시절 인연을 만나게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자연계에서는 이러한 시절 인연의 현상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태풍이나 지진으로 인해 죽어가는 것들을 너무나 많이 목격하게 된다.

그렇다고 태풍과 지진이 잘못한 것도 아니요,

이로 인해 죽어가는 생물들과 동물들이 잘못한 것도 물론 아니다.

원인과 결과의 인과(因果)에 의한 시절 인연이 나타나는 현상들인 것이다.

 

‘사람을 어떻게 자연현상과 비교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도 너무나 자연스런 인과(因果)의 현상인 것이다.

법적인 것과 도덕 윤리, 계율, 등의 인위적인 것은,

때와 장소를 조금 달리할 뿐이지,

근본적으로 각자의 고락(苦樂) 업(業)을 없앨 수는 없다.

 

죽고 사는 것은 제천(諸天)이라 하지 않았던가.

하늘의 뜻이란 바로 시절 인연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이나 사람이나 생로병사(生老病死)하고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다만, 자연적으로 생사(生死) 생멸(生滅)하는 것은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만 유독 민감할 뿐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시절 인연이 도래할 때, 좋고 나쁜, 즐겁고 괴로운,

분별(分別)의 마음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마음을 깨친 이에게는 인과(因果)로 인한 고통이 없다.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이다.

시절 인연의 질서와 인과(因果) 법칙에 따를 뿐이다.

 

반면에, 몸을 다치거나, 죽음에 이르거나, 가족을 잃거나,

재산을 모두 날리거나, 등등의 사고에 의해 고통을 느끼는 것은,

각자 가지고 있는 인과(因果)의 업(業)에 의해,

큰 고통의 고업(苦業)이 시절 인연에 따라 나타난 것이므로,

평소에 업(業)을 얼마나 멸(滅)하고,

중도(中道)의 마음을 얼마나 갖추느냐에 따라 상황은 얼마든지 달라지게 된다.

 

마음을 깨쳐 중도심(中道心)을 갖춘 이에게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도 않겠지만,

한 치 오차 없는 시절 인연에 따라 설사 죽음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한 점의 공포나 고통 등의 괴로운 고업(苦業)이 발생하지 않게 된다.

인과(因果)를 믿고 시절 인연에 맡길 뿐이다.

오늘도 긴긴 밤 맑은 하늘 걱정할 것이 없어서 걱정이로구나.

 

총무원장 진우스님.

[불교신문 3828호/2024년7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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