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아직도 운이 없어 불이익 받는다 생각하나요?” -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증도가 강설]
- <35> “아직도 운이 없어 불이익 받는다 생각하나요?” -
제67화 좋은 일이 생기는 때가 따로 있다
용상축답윤무변(龍象蹴踏潤無邊)
삼승오성개성오(三乘五性皆惺悟)
용상이 차고 밟음에 윤택이 그지 없으니
삼승과 오성이 모두 깨치는도다.
강의
용과 코끼리는 가장 수승한 신장(神將)을 말한다.
마지막 깨달음을 앞둔 조사님들이나 아라한을 뜻하기도 한다.
이들은 지혜가 윤택하여 법의 북소리만 들어도 깨침을 이루게 된다.
삼승(三乘)과 오성(五性)도 모두 다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이다.
삼승은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을 말하는데,
성문은 고집멸도 사성제를 통하여 마음을 깨친 이고,
연각은 인과와 연기법 즉, 12연기를 통해 마음을 깨친 이들이며,
보살은 육바라밀과 육도만행을 통해 마음을 깨친 이다.
오성은 <원각경>에 나오는 다섯가지 성품을 가진 이들을 말하는데
즉, 삼승의 성문연각 2승과, 보살성을 포함하여 범부성(凡夫性), 부정성(不定性)
(보살도 범부도 성문연각도 아닌), 그리고 외도성(外道性)이다.
아무튼 완전한 부처의 성품을 깨친 이들이 수없이 많고,
앞으로도 그 어떤 중생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성불을 하고야 말 것이므로,
나는 안된다고 포기하거나, 부처님 법이 어렵다고
퇴굴심(退屈心)을 낼 필요가 없다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불교의 수행은 알고 보면 따로 특별한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분별된 마음만 내려놓으면 그 뿐이다.
일단 인과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절대 의심을 하면 안된다.
궁극적으로는 세상 누구나 더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보는 중생은 없다.
더 좋고 더 나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완벽히 믿어야 한다.
그래서 사실은 알고 보면 모두가 평등한 것이다.
다만 시절 인연에 따라 좋을 때가 있고, 안 좋을 때가 있을 뿐이다.
누구나 좋은 시절이 있으면 안 좋은 시절이 있기 마련이고,
젊을 때가 있으면 늙을 때가 있고,
건강한 때가 있으면 병이 들 때가 있듯이 말이다.
태어날 때가 있으면 반드시 죽을 때가 있듯이,
이런 때가 있으면 저런 때가 생겨나기 마련이니,
사바세계의 모습이 그렇고 사바세계를 만드는 마음의 모양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다 보면 어떤 이는 운이 좋은 이가 있고,
어떤 이가 지질이도 운이 없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그러나 이는 시차의 문제일 뿐이다.
그런 때가 당도했을 뿐이니, 이는 삼세를 통해야 계산이 나온다.
현재의 삶이 있으면 전생의 삶이 있었을 것이고, 내생의 삶도 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은 인연이 서로 연결되어 계속 이어지는 연기의 모습이므로,
저절로 뚝 떨어져서 홀로 생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기라고 주장하는 아상의 모습은 수시로 바뀐다.
지금은 사람의 몸을 받고 있지만
인과, 인연, 연기에 따라 나의 물리적인 몸의 모습은 항상 바뀔 수 있다.
하다못해 영혼이 될 수도 있고, 소위 귀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 몸의 모양이 어떻든 간, 문제는 업식이라고 하는 고락의 인과 업이 문제이다.
좋고 싫은 감정이 곧 고락의 업이라 하는데, 이는 항상 설명했듯이,
좋고 편안한 마음의 성질 크기와, 괴롭고 불편한 마음의 성질 크기가 똑같다.
이는 짐승도 마찬가지이고, 영혼도 마찬가지이며, 아라한이나 보살도 마찬가지이다.
고락의 업이 크다는 것은, 좋고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이 이미 크거나,
이를 바라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인과의 과보에 따라,
싫고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마음 역시 똑같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중도의 마음을 가지라 하셨다.
좋다 싫다는 분별된 마음은 악순환하고 윤회할 수밖에 없으니,
천상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이 두가지의 마음 모두 없애야 업을 멸하고 중도의 여여함이 된다는 말씀이다.
이를 깨침이라 하고 깨달음이라 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행복했다면, 딱 그만큼의 질량으로
괴로운 마음이 생겨 불행한 때가 반드시 찾아오고야 만다고 했으니,
다만 나타나는 시간이 서로 다를 뿐이다.
해가 뜨는 시간과 해가 지는 시간이 다르듯이,
밀물이 들어오는 시간과 썰물이 나가는 시간이 다르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할까?
일단 좋고 싫은 분별심을 내지 말고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
그 어떤 일이 나에게 닥치더라도 좋고 싫은 고락과
옳고 그른 시비의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말과 행동은 얼마든지 하더라도, 절대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된다.
이미 설명했듯이, 모든 것은 결국 득실과 정(正) 부(否)가 없기 때문에,
감정을 내면 낼수록 고락의 인과만 쌓일 뿐이니, 인과의 흐름만 조용히 살펴볼 뿐,
고락시비의 감정을 절대로 일으켜서는 안된다.
조바심이나 집착, 이익과 욕심을 내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니,
곧바로 인과 과보로 이어져서 괴로움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행치 않는 이들은 오늘부터라도 연습과 습관을 길러보기 바란다.
이러한 신심과 무심, 무분별, 무집착의 마음을 유지한다면,
죽음도 피해 갈 수 있게 하는 힘이 생겨날 것이다.
총무원장 진우스님
[불교신문 3837호/2024년9월17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