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우리들은 귀한 인연들 입니다.
불교 이야기

- 21.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 한 상(相)조차도 상(相)이 없음) -

by 수선화17 2023. 2. 27.

(진우 스님의 금강경 강설)

- 21.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 한 상(相)조차도 상(相)이 없음) -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도적을 자식으로 둔 것과 같다

다툼없는 삼매란 집착함 없고 얻었다는 상 자체가 없는 삼매

한생각 깨치면 그것이 불국토요 행동에 걸림 없는 것이 장엄

어떤 선택이든 집착이나 미련 갖지 않는다면 좋은 인연 귀결

 

세존 불설아득무쟁삼매 인중최위제일 시제일이욕아라한

세존 아부작시념 아시이욕아라한 세존 아약작시념 아득아라한도

세존 즉불설수보리 시요아란나행자 이수보리 실무소행 이명수보리 시요아란나행

(世尊 佛說我得無爭三昧 人中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世尊 我若作是念 我得阿羅漢道

世尊 卽不說須菩提 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提 實無所行 而名須菩提 是樂阿蘭那行)

“세존께서 수보리 저를 ‘다툼 없는 삼매를 얻은 이 가운데 제일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첫째가는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오나,

세존이시여, 저는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일 ‘내가 아라한과의 도를 얻었다’ 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저에게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시지만,

제가 실제로 행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것이라고 이름 하신 것입니다.”

 

다툼이 없는 삼매란,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지 않아서

적멸자성(寂滅自性)에 항상 머물러 생멸이 안정되었다는 뜻이다.

대체로 다툼이란 욕심에 의해 생기는 것이니, 욕심을 떠났기 때문에 다툼이 있을 수가 없다.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께서 나를 지목하여

‘다툼 없는 삼매를 얻음에 있어 사람 중에 제일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내가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거니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조금이라도 이를 염두에 두었다면 세존께서

우선 수보리를 가리켜 아란나행(阿蘭那行)을 즐기는 자라고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수보리 저는 다툼 없는 삼매에 있으나,

실은 머물러 집착함이 없고 얻었다는 상(相)이 없으므로

아난나행(阿蘭那行)을 즐긴다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는 소위 세존께서 “불(佛)과 법(法)이라는 것은 곧 불과 법이 아니니라” 고 하신

말씀에 불과 법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대중들에게 명쾌한 답을 하심으로,

성문승인 자신들이 얻은 4과를 스스로 깨닫게 하여 불과 법도 그러함을 가르치려 하심이다.

 

아무리 좋은 생각, 좋은 감정, 좋은 행동일지라도 인과에 걸리게 됨이니,

그러하여 나쁜 생각, 나쁜 감정, 나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생각이더라도 집착하고, 연연하고, 미련을 가지게 되면,

곧바로 나쁜 인과가 작용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어떤 그 무엇에도 끌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 정토를 장엄함)

불고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석재연등불소 어법 유소득부

(佛告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昔在燃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불야 세존 여래재연등불소 어법 실무소득(不也 世尊 如來在燃燈佛所 於法 實無所得)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전생에 연등불 회상에서 얻은 법이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불 회상에서 실로 얻은 법이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에 스스로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유동보살’로 보살계를 닦고 있을 때, 어느 날 연등불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길가에서 기다리다가 7송이의 연꽃을 부처에게 공양하였다.

연등불은 미소를 띠며 이를 받으시고

‘너는 미래세(未來世)에 석가모니불이라는 부처가 될 것이다’ 라는 수기를 주셨고 한다.

그리고 연등불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는 공양물을 준비하지 못해

스스로 진흙 길에 엎드려 몸을 밟고 지나가시게 하여 수기를 받았다고도 한다.

이를 연등불수기(燃燈佛授記)라 하며, 불교에서 보살의 개념이 생긴 연유이기도 하다.

 

세존께서 수보리에게 그동안 불과 법을 얻었느냐고 몇 번에 걸쳐 물으셨다.

수보리는 얻은 바가 없다고 하고, 얻었다고 하면 이미 얻은 것이 아니므로

스스로 얻은 바가 없이 얻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다시 세존께서는 자신의 과거세에 연등불로부터 수기를 받았던 것을 되새기며

수보리에게 세존이 내가 얻은 바가 있느냐고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자 수보리는 실로 얻은 바가 없다고 하였다.

얻는다는 것은 이미 수자상(壽者相)이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된다.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도적을 자식으로 둔 것이나 다름없다.

하물며 먼저 부처님이, 나중 부처님께 법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무엇인가 있다, 또는 없다, 얻었다 또는 잃었다라는 생각과 감정은 이미 인과를 낳을 뿐이니,

정신은 뚜렷이 깨어 있으되 이것이라는 상이 생기면 이미 저것이라는 인과에 걸리게 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상대적인 상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 될 것이니,

부단한 정진만이 해탈의 길로 인도해 줄 것이다.

 

불치병 가운데 하나인 암이 현대인들에게 많이 발병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학이 엄청나게 발달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특효약이 없는 형편이다.

암이 생기는 원인에는 유전적인 요소와 함께 잘못된 식습관,

그리고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한다.

유전적인 원인을 살펴보면 전생의 업과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전생부터 쌓아온 탐욕에 의한 업과가 시절인연에 의해 지금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부모의 업과 나의 업이 비슷하기 때문에 유유상종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식습관은 식욕에 의한 즐거움의 과보로 인하여

고업(苦業)의 인과가 지금 바로 나타나는 업과(業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스트레스에 의한 발병은 역시 무엇이 되었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되지 않았을 때, 속이 상하면서 생기는 업보로 볼 수 있다.

자신은 별로 욕심을 부리지 않았는데 암이 생긴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잠재적인 욕심까지도 기인하는 것이니만큼,

위의 세 가지 원인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의 원인 모두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이니,

원하는 것을 성취함에서 오는 즐거움과 기쁨, 행복에 대한 인과작용으로

고통과 괴로움의 과보가 암으로 발병된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에 대한 의심을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스트레스가 될 수 있으니,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금강경’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게 된다면,

암이라는 상, 스트레스라는 상, 병이라는 상, 괴로움이라는 상, 억울하다는 상,

건강이라는 상, 나아야 한다는 상까지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연기를 믿고, 인과를 믿고, 이렇게 가르쳐주시는 부처님을 믿고,

더 이상의 의심이나 불만을 갖지 않고 신심으로 정진한다면, 업이 멸해지고,

인과가 사라지는 동시에, 일체의 암이나 병들이 함께 사라지면서,

나의 육신과 정신은 불토(佛土)의 장엄(莊嚴)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 장엄불토부(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불야 세존 하이고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 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 하지만

‘장엄한다’라고 하면 이미 장엄함이 아니고 그 이름을 장엄이라고 합니다.”

 

장엄은 굉장한 엄숙함이고, 불토는 불국토를 말함이니, 완전한 적정처를 뜻한다.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각종 유형의 불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을 깨치면 불토요, 모든 행동에 있어서 걸림이 없는 것을 장엄이라 한다.

 

“보살법은 본래 이러 하건데, 불의 과가 이러하거늘 실상 얻을 바 법과 과가 없습니다.”

세존께서 수보리의 답을 들으시고 다시 물으시기를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느냐? 고

강조하여 물으시니, 수보리가 다시 답하기를 불토는 장엄함이 곧 장엄이 아니고

그 이름이 장엄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다른 대중의 눈에는,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땅이 육종진동(六種震動)하는 등,

칠보(七寶)와 향기로 공양하는 가운데 천룡팔부(天龍八部)가 호위하며,

실로 삼천위의(三千威儀)를 갖추는 장엄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은 선택에 대한 고민을 깔끔하게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것을 선택할까? 저것을 선택할 것인가?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진리처럼 회자되기도 한다.

하물며 군에 입대하여 어떤 줄을 서느냐에 따라 제대 때까지의 편안함이 가늠된다고도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선택할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라를 운영하는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업을 하는 이들을 비롯하여,

하물며 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름 심각하게 선택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선택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과는 달리, 종국적으로는 어떤 그 무엇을 선택하든,

결과적으로는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선택에 대한 고민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왜? 선택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본질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본질은 무엇일까? 선택을 하려고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조금이라도 나에게 유리한 것을 차지하려고 하는 본능의 발로이다.

궁극적으로는 불리한 것을 피하고 유리한 것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 만족감과 희열감을 만끽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한다.

선택을 잘했다고 믿는 동시에 즐거움과 기쁨, 행복감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과가 발생하게 되니, 즐거움과 기쁨, 행복한 만큼의 괴로움과 슬픔,

불행한 과보가 생기게 되어 언젠가는 시절인연(時節因緣)으로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선택하든 한번은 잘 선택하게 되고, 동시에 한번은

잘못 선택하는 필연적인 인연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니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선택이란 결국 욕심의 발로인 만큼, 이 또한 인과를 피할 수가 없다.

가장 좋은 선택의 방법은, 무엇을 선택하든 불안해하거나 조바심을 내지 말고,

인과를 믿고 연기를 믿으며, 선택하는 대상에 대해 상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차피 이것을 선택하면 다음엔 저것을 선택하게 되는 인과 인연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때로는 불리한 선택을 했다고 하여 실망할 필요가 없다.

물론 다음엔 좋은 것을 선택하게 되는 과보도 있겠으나,

어떤 것을 선택하든 선택의 대상에 대한 상, 즉, 집착과 미련을 갖지 않는다면,

그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더라도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무엇을 선택하든 항상 좋은 인연으로 장엄하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선택하든 좋고 싫은 고락의 상을 갖지 않는다면,

그 어떤 선택의 대상도 불토가 되고 장엄이 되어,

늘 분별없는 완전한 선택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 어떤 선택이 되었든 고민하지 말 것이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656호 / 2022년 11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