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하 스님의 열반경 이야기]
- <17> 달의 비유 -
여래 참성품은 달과 같이 충만한 ‘법신’
여래 성품엔 생멸이 없지만
중생 교화하기 위한 까닭에
모양을 달리해 보여준 것 뿐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여래는 항상 머무는 법이라 이름하니, 비유하면 달과 같다.
사람들은 달이 지면 달이 사라졌다 말하지만, 달의 성품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달이 다시 뜨면 중생들은 다시 달이 나타났다 말하지만, 달의 성품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설령 수미산이 가릴지언정(지구의 그늘에 따라 달이 변화하는 것),
달 자체는 본래 나거나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래 역시 그러하다.
여래가 염부제에서 부모로부터 그 몸을 드러내면 중생들은 ‘여래가 이 땅에 나셨다’고 말하니,
마치 달이 떠오른 것과 같다.
여래가 그 육신을 버리시면 중생들은 ‘여래가 반열반에 드셨다’고 말하니,
비유하면 달이 없어졌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선남자야, 여래의 성품에는 실로 생멸이 없건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까닭에 생멸을 보이신 것이다.
선남자야, 다시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다. 중생들은 때와 달의 형세에 따라
각각 초승달, 보름달, 그믐달이란 생각을 하지만, 달의 성품에는 이지러지거나 차는 것이 없다.
여래 역시 그러하니, 처음 탄생을 드러내는 것은 초하루의 달과 같다.
일곱 걸음을 걷는 것은 제2일의 달과 같고, 서당에 다니는 것은 제3일의 달과 같다.
출가를 한 것은 제8일의 달과 같고, 성도를 이루신 것은 제15일의 보름달과 같으며,
열반을 보이신 것은 그믐달과 같다.
이처럼 중생에 따라 혹은 반달로, 혹은 보름달로, 혹은 그믐달로 보지만,
달의 성품은 사실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으며, 사라지는 일도 없이 늘 충만하다.
여래의 몸도 역시 그러하여 항상 머물며 변하지 않는다고 이름한다.
선남자야, 다시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다.
보름달이 뜨면 방방곡곡의 성읍ㆍ취락ㆍ산ㆍ강ㆍ우물ㆍ물동이 등에
모두 빠짐없이 나타나는데, 범부들은 먼 길을 떠나서도
달이 항상 따라오는 것을 보고는 허망한 억측을 한다.
‘내가 본래 읍내의 집에서 달을 보았는데, 이제 이 연못가에서도 달을 보고 있다.
이것이 본래의 달인가, 본래의 것과 다른 달인가?’
또 달의 크기에 대해서도 어떤 이는 ‘솥뚜껑만하다’ 하고,
어떤 이는 ‘수레바퀴만하다’ 하며, 혹자는 ‘사십구 유순만큼 크다’고 말한다.
달의 성품은 하나인데 중생마다 만 가지 모습을 보는 셈이다.
선남자야, 여래 역시 그러하다.
세간에 출현하면 중생들은 저마다 ‘여래가 지금 내 앞에 계시다’고 생각하고,
혹은 귀머거리나 벙어리는 여래를 귀머거리 또는 벙어리로 보기도 하며,
각각의 중생이 모두 ‘여래는 우리와 같은 말을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중생은 여래의 몸이 광대무변하다고 보며, 어떤 자는 아주 미세하다고 보며,
어떤 자는 부처님이 곧 성문의 형상이라고 보며, 다시 어떤 자는 연각의 형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여래의 참성품은 비유하면 저 달과 같으니,
곧 그것이 법신이며 그것이 ‘태어남이 없는 몸(無生身)’이다.
단지 방편의 몸이 세간에 따라 응하여 무량한 본업(本業)의 인연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존재하는 곳마다 태어남을 시현했으니, 그것은 저 달과 같다.
그러므로 여래는 항상 머물러서 변하고 바뀌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대반열반경> 제9권 ‘여래성품’에서)
[불교신문 3767호/2023년5월9일자]
용하스님/ 포천 정변지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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