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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

- 21. 알음알이에 대한 집착 -

by 수선화17 2023. 11. 19.

(고담혜민 스님의 법화경 공부)

- 21. 알음알이에 대한 집착 -

 

불법이라도 붙잡고 매달리지 말라

집착이 실상 보지 못하게 막아

법에 대한 알음알이도 놓아야

평범한 일상이 결국은 목적지

연화를 벗어난 묘법 따로 없어

 

구도자에게 가장 큰 장애가 무엇일까?

바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집착이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집착이

지금 눈앞에 환하게 드러나 있는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막고 있기 때문이다.

선불교 전통에서는 이 장애를 알음알이라고 하는데,

구도자를 끝까지 가장 힘들게 하는 알음알이가 바로 부처님 법에 대한 알음알이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부처님 법만을 보면서 어렵게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분일수록,

그 소중한 법에 대한 알음알이를 놓으라고 하면

아이가 엄마를 버리지 못하듯이 끝까지 붙잡고 있으려고 한다.

 

두 가지 흔한 예를 들어보면, 먼저 차제(次第)에 대한 알음알이이다.

차제라고 하면 우선 ‘깨달음’이라고 하는 종착역이 따로 있다고 상정해 놓고,

그 종착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런  저런 단계적인 수행의 순서를 밟아가야 한다는 믿음이다.

보통 상식으로 보면 이 말이 정말로 맞는 말처럼 들린다.

이 세상 모든 일이 어떤 목표를 세워 그것에 도달하려고 하면

하나씩 둘씩 노력을 들여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것이 맞지 않는가?

영어를 배우는 것도 알파벳부터 배우기 시작해서 문법을 하나씩 익혀나가는 것이 맞는 것이고,

수영을 배워도 물속에서 벽을 잡고 발차기부터 시작해서 자유형,

배영을 하나씩 익혀가는 것이 맞는 말이다.

특히 차제가 있어야 내가 어떤 방향을 향해 점진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

그 감이 잡히기에 종착역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해 보인다.

 

그런데 만약 내가 도달하고 싶어 하는 종착역에 이미 도착해서

아주 잠시라도 그 종착지에서 떠나본 역사가 없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때도 차제가 필요하다고 할까? 예를 들어 서울에 도달하고 싶어서

한평생을 꾸준히 서울역을 향한다는 방향으로 많은 노력을 들이면서 가고 있었는데,

내가 어느 순간 문득 정신 차리고 보니

지금까지 서울에서 쭉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수행의 맨 첫발을 딛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종착지에 도달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때도 차제를 둘 것인가?

차제는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알음알이가 있다면,

한 단계씩 올라가기 위해 노력을 하느라 본인이 어디에 지금 있는지 못 보게 된다.

즉 끝없이 추구하는 일체의 노력이 완전히 멈출 때 실상이 바로 드러나는 것이다.

 

또 다른 알음알이는 실상에 대한 올바른 표현처럼 보이는 문장들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본래 성품은 텅 비어서 허공과도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나,

아니면 텅 비고 고요한 것이 신령스럽게 살아있다는 표현들이 여기에 속한다.

하나의 주인 없는 마음이 온 우주에 가득 차 있다는 표현이나,

모양 없는 한 마음이 온갖 묘용을 부려 천 가지 만 가지 분별을 통해

삼라만상들을 만들어 낸다와 같은 표현들이 여기에 속한다.

심지어 깨달은 실상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이나,

일체의 언어가 떨어져 나간 자리라고 하는 표현도 여기에 속한다.

그 어떤 것도 여기에는 세울 수 없다고 하는 말이나,

내가 손댈 것이 없이 이미 완벽하게 깨어있다고 하는 말도 여기에 속한다.

분별하기에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지 분별이 멈추면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는 표현도 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역시 알음알이다.

 

이상하게도 처음 실상을 힐끗 보게 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면서, 질문도 계속 생기게 된다.

그래서 도반들을 만나 법담을 하는 것이 너무 즐겁고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앞에 간 선배 구도자님에게 계속해서 묻게 된다.

그러다 점점 더 익어지면 법에 대한 내면의 소리가 점점 줄어들어

초창기에는 5분 했던 말들이 1분으로 줄고,

더 나가면 1분의 말들도 한마디로 간략하게 줄고,

결국에는 그 한마디도 꼭지가 똑하니 떨어져 나가 아무런 할 말이 없어지게 된다.

알음알이가 사라지고 나니 진리의 실상이라는 세계가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런 생각이 다 망상이었고,

그 망상이 사라지니 이 평범한 일상이 결국은 모든 구도자가 도착해야 할 목적지였다.

우리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서 잘살고 있었으니 더 뭐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묘법연화경’에서 묘법과 연화가 하나라는 뜻도 이것과 다르지 않다.

묘법 자체가 바로 연화였지, 연화를 벗어난 묘법이 따로 있지 않다.

 

혜민 스님 godamtemple@gmail.com

[1703호 / 2023년 11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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