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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

- <41> 결정된 업과 결정되지 않은 업 -

by 수선화17 2024. 1. 29.

[용하스님의 열반경 이야기]

- <41> 결정된 업과 결정되지 않은 업 -

 

부처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

모든 업에 과보가 있는 건 필연적이지만

무상지혜를 성취하면 과보랄 것도 없다

 

사자후보살의 의문은 업에 따라 과보가 결정된 것이라면

선업도 악업도 결국 무상보리를 얻지 못하리라는 것이며,

외도의 주장은 중대한 악업을 지은 이도 선한 과보를 얻기도 하므로,

과보에 어떤 결정된 바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업에 반드시 상응하는 과보가 있는 것은 인연에 화합하는 결과이므로 필연적이다.

그러나 무상지혜를 성취하면 업의 굴레에서 해탈하게 되며,

해탈하였으므로 과보랄 것도 남는 것이 없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우리가 부처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사자후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만약 사람이 중대한 마음으로 선한 업이나 악한 업을 지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과보가 결정적이라면 중생은 무상보리를 성취할 수 없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순타는 부처님께 마지막 공양을 올리는 선업으로

무상보리를 성취하리라 수기를 받았는데,

만약 과보가 결정적이라면 순타가 어찌 무상보리를 구하겠나이까?

또 방등경을 비방하고 4중계를 범한 일천제의 죄는 끝이 없는데,

그 중생이 어떻게 부처님 성품을 보며, 또 어떻게 무상보리를 성취할 수 있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일체의 업을 지음에는 가벼움과 무거움이 있으며,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결정된 것이고, 둘째는 결정되지 않은 것이다.

선남자야, 어떤 외도는, ‘악한 업에 과보가 없다.

만약 악업에 결정코 과보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찌하여 기허전다라가 하늘에 태어나고,

앙굴마라가 해탈의 과보를 얻겠는가?’라고 말한다.

나는 이런 삿된 견해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체의 지은 업은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하였느니라.

 

선남자야, 중생에 무릇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혜로운 사람이고, 둘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의 힘으로

능히 지옥에서 받을 지극히 무거운 업을 현세에서 가볍게 받기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현세에서 받을 가벼운 업조차 지옥에서 무겁게 받기도 하느니라.

마치 오물이 두 사람의 옷을 더럽혔을 때,

한 사람은 자각하여 곧 세탁하고 옷이 이내 정결하지만,

한 사람은 자각하고도 세탁하지 않기 때문에 그 옷이 날마다 점점 더러워지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만약 일체의 업이 결정코 과보를 받는다면 곧 응당 범행과 해탈을 구하지 않을 것이지만,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곧 범행과 해탈의 과보를 수행하느니라.

만약 일체의 악한 업을 멀리 여의면 곧 선한 과보를 받고,

만약 선한 업을 멀리 여의면 곧 악한 과보를 받는다.

일체의 성인이 도를 수행하는 까닭은 결정된 업을 파괴하여 가벼운 과보를 받기 위함이니,

결정되지 않은 업에는 과보가 없기 때문이니라.

 

만약 일체의 업이 결정코 과보를 받는다면,

곧 성스러운 도를 수행하는 것을 구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러나 만약 성스러운 도를 닦는 것을 멀리 여의고 해탈을 얻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으며,

해탈하지 않고 열반을 얻는다는 것 또한 옳지 않다.

결정된 것은 현세의 과보와 다음 생의 과보와 후생의 과보이며,

결정되지 않은 것은 인연이 합하면 곧 과보를 받고 합하지 않으면 받지 않으니,

이러한 의미로 응당 범행과 해탈과 열반이 있다.

 

- <대반열반경> 제31권 ‘사자후보살품’에서

 

사자후보살의 의문은 업에 따라 과보가 결정된 것이라면

선업도 악업도 결국 무상보리를 얻지 못하리라는 것이며,

외도의 주장은 중대한 악업을 지은 이도 선한 과보를 얻기도 하므로,

과보에 어떤 결정된 바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업에 반드시 상응하는 과보가 있는 것은 인연에 화합하는 결과이므로 필연적이다.

그러나 무상지혜를 성취하면 업의 굴레에서 해탈하게 되며,

해탈하였으므로 과보랄 것도 남는 것이 없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우리가 부처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포천 정변지사 주지 용하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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