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신심명 강설]
- <14> 한번 생겨난 것은 사라지는 과보를 받는다 -
제25화 웃는 사람의 인과는
본문
무구무법(無咎無法)
불생불심(不生不心)
허물(咎)이 없으면 연기법(緣起法)도 없고
생기지 않으면 마음도 없다.
강설
허물이 없다는 것은 고민할 것도 없고 고통과 괴로움도 없으며,
따라서 과보(果報)가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무엇이 되었든 이러쿵저러쿵 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
연기(緣起)하는 것도 없고, 공(空)도 없으며, 굳이 진리를 찾을 필요도 없다.
그야말로 마음이 텅 비어 있어서 이를 진공(眞空)이라 이름할 뿐,
말과 문자, 그리고 상상으로도 전혀 알 수 없는 경지를 가리킨다.
굳이 억지로 표현하자면
진공묘유(眞空妙有- 모두가 진공을 머금은 존재들의 움직임)라 할 것이다.
만약 터럭만큼이라도 생기는 것이 있다면 터럭만큼의 존재가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연기(緣起)가 일어나고,
고락(苦樂)의 인과(因果)가 덩달아 달라붙게 되어,
이를 유위(有爲)라 하고 사바(娑婆)라 이름한다.
터럭만큼의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마음이라는 자체가 생기지 않게 된다.
무구무법(無咎無法)이 곧 불생불심이요, 불생불심(不生不心)이 곧 무구무법이 된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또한 같은 의미이다.
이 같은 경지에 이르려면
세상과 세속의 삶에는 전혀 집착함이 없는 마음 상태가 되어야 한다.
마치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면서 삶의 전부인 것처럼 울고불고 온 정신을 모두 쏟지만,
어른의 입장에서는 마냥 귀엽게 보는 것과 같다.
지구 안에서는 전쟁을 비롯하여 개인들의 시시비비 등,
온갖 일들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지구 바깥에서 이를 바라보는 이에게는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그리 중요치가 않다.
다만 지구를 아름답게 바라볼 뿐이다.
아마도 세속을 떠난 집착 없는 마음이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웃는 사람을 본다.
웃었으니 인과(因果)에 걸린다.
그 과보(果報)로 머지 않아 울 일이 있을 것이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을 본다.
돈을 벌었으니 기쁠 것이다.
기쁨이라는 마음이 인과(因果)에 걸린다.
머지않아 슬픔이라는 과보(果報)를 받게 될 것이다.
피할 수 없다.
한번 생겨난 것은 사라지는 과보를 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쁨이 생겼다 사라지면 슬픔이 된다.
이를 인과(因果)라 하고 사바(娑婆)라 한다.
덫에 걸린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일들이 짧은 시간에 오고 갈 수도 있고, 수 년, 수십 년,
또는 과거생(過去生)과 내생(來生)에 걸친 긴 시간에 따라 오고 갈 수도 있다.
시절인연(時節因緣)이다.
지혜인(智慧人)은 이를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인과(因果)에 걸리지 않으려고 한다.
참으로 귀찮기 때문이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고 돌리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래서 아예 생각을 놓고, 감정을 놓아,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놓고 또 놓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 방법 중에 참선이 최고다.
우선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비우고 화두(話頭)를 챙긴다.
이와 같이 계속하여 수행하다 보면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생기지 않고,
움직이면서도 감정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세속의 인과를 피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아니면 그냥 살면 된다.
욕심을 부린 만큼 과보(果報)를 받으면 된다.
울고불고 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일 뿐이다.
누구를 탓하랴.
헷갈리면 기도하라, 그리고 무조건 보시하라, 계속 정진하라.
오늘도 똑 같은 말로 반복하였으나,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길 바란다.
송(頌)
기쁨이 오면 슬픔의 대가 인줄 알고
슬픔이 오면 기쁨의 과보인 줄 알아라.
기쁨의 마음을 내지 않으면 슬픔이 오지 않고,
원하는 것이 없으면 원하지 않는 것도 생기지 않는다.
제26화 생각을 생각하기
본문
능수경멸(能隨境滅)
경축능침(境逐能沈)
능(能)은 경(境)을 따라 소멸되고,
경(境)은 능(能)을 따라 침몰한다.
강설
조금 다르게 해석하면,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사라진다는 말이다.
능은 주관을 의미하는데 곧 나의 생각이다.
경은 객관을 의미하고 내가 보는 대상이다.
불교 유식(唯識)에서, 일체 만법(萬法)을 변화시키는 것을 식(識)이라 하는데,
이를 능변(能變)이라 하고, 능변에 의해 나타나는 대상을 소변(所變)이라고 한다.
이번 게송은 자칫 잘못 해석하면 뜻이 잘 이해되지 않기 쉽다.
내 생각이 바깥 경계를 따라 소멸된다는 뜻이 아닌, 소멸시키라는 뜻이다.
바깥 경계에 끄달리지 말라는 것이니, 바깥 경계를 대하면서 주관
즉, 내 생각을 내지 말라, 즉 분별(分別)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바깥 경계에 대해 나의 주관적인 분별된 생각을 하지 않음으로써,
바깥 경계 역시 저절로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살면서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문제의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문제라고 생각하는 나의 생각이 문제라는 것이다.
살면서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설사 바라는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바깥에서 그 요인을 찾기보다는
성취하고 말겠다는 나의 생각이 장애를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일상을 살아가든, 수행을 하든, 내가 원하는 마음이 강할수록 장애가 더욱 강해지게 된다.
만약 하늘을 날고자 하는 마음이 강할수록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애탐이 생기게 되고,
내가 죽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강할수록 죽음을 면할 수 없어서 그 슬픔도 배가 되고 만다.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실 세상 모든 것은 인과(因果) 인연에 따라
한 치 오차없이 정확히 움직이고 있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이를 억지로 분별하여 내 맘대로 하고자 하는 내 마음이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있다.
‘왜’라는 물음도 스스로 만들어 묻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할 때도 스스로 지어서 묻는 것이다.
내가 누구이든 누구가 아니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렇게 묻고 있는 내가 스스로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터럭만큼의 생각조차 틀리다는 것이니, 분별된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잘 되고 저렇게 되면 안된다’라는 것은 본래 없다.
다만, 스스로의 생각에 묶여 분별을 짓는 것이니,
모든 것의 장애는 분별된 자아의식(自我意識)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네 나쁘네, 옳네 그르네’하며 분별 망상을 쉬지 않으려 한다면,
그에 대한 인과(因果)의 과보(果報)로 말미암아 괴로움과 고통이 끊이지 않는다.
이것을 하루빨리 깨쳐서 청정한 마음으로 걸림 없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한 생각은 두 마음의 분별심을 낳고, 분별심으로 인해 고락 시비가 생기며,
고락 시비는 인과를 낳아 고통과 괴로움을 만들어 낸다.
이러쿵저러쿵 아무리 해봐야 거기에서 거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에
한 생각, 한 감정, 분별 망상을 없애야 한다.
그러려면 생각하고 머리를 써서 될 일이 아니라,
무조건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으로 고통, 괴로움, 불편함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송(頌)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어도
불편한 마음에는 견줄 수 없고
불에 타는 고통이 있어도
편안한 마음에는 견줄 수 없네.
[불교신문 3769호/2023년5월23일자]
총무원장 진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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