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하스님의 열반경 이야기]
- <30> 그대는 당도하였는가? -
여래의 법이 중생을 포섭하고
중생 속에 법이 잠재한다는 것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듣지 못한 것을 듣는다'는 의미는 이해할 수 없나이다.
왜냐하면 만약 법이 있다면 곧 결정코 있는 것이고,
또 없다면 역시 결정코 없는 것이니, 없는 것은 응당 생기지 않을 것이고,
있는 것은 응당 소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듣는 것이라면 곧 듣는 것이고, 만약 듣지 못하는 것이면 곧 듣지 못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듣지 못한 것을 듣는다고 말씀하시나이까?
비유하면 가는 것이 도달했으면 곧 가는 것이 아니고,
또 가고 있는 것은 곧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과 같나이다.”
그때 “부동(不動)” 불국토의 유리광보살이
<대열반경>의 설법을 듣고자 사바세계에 당도하여 부처님께 예를 올렸다.
부처님께서 물었다.
“그대는 당도하였는가, 당도하지 않았는가?”
유리광보살이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이르렀어도 온 것이 아니고, 이르지 않았어도 온 것이 아니니,
제가 이 뜻을 관찰하건대 도무지 오는 일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인연이 있어 이르지 못할 데에 이르지 못하고,
인연이 있어 이르지 못할 데에 이르며, 인연이 있어 이를 데에 이르고,
인연이 있어 이를 데에 이르지 않는다.
무슨 인연으로 이르지 못하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가?
이르지 못하는 데는 곧 대열반이니, 범부는 도달하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이고,
몸으로 짓는 업과 입으로 짓는 업이 청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 온갖 부정한 것을 받기 때문이니라.
무슨 인연으로 이르지 못하는 데에 이르는가?
이르지 못하는 데는 곧 대열반이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몸과 입으로 짓는 나쁜 업을 영원히 단절하며,
일체의 부정한 것을 받지 않으므로 이르지 못하는 데에 이른다.
무슨 인연으로 이를 데에 이른다고 하는가?
이르는 데는 곧 이십오유(二十五有: 중생이 윤회하는 ‘六道’를 세분한 것)이니,
일체중생이 항상 한량없는 번뇌의 온갖 결박에 덮여서 갔다 왔다 하면서도
여의지 못하는 것이 마치 수레바퀴가 도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이를 데에 이르는 것이다.
무슨 인연으로 이를 데에 이르지 않는다고 하는가?
보살은 이십오유를 영원히 여의게 되었으므로 이르지 않는다고 이름하느니라.
그러나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고자 하므로 도달함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느니라.
선남자야,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는 것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 <대반열반경> 제21권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에서
삼보가 귀한 이유는 곧 듣지 못하는 것을 들려주기 때문이다.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은 중생의 세간법과
여래의 출세간법을 이분법적인 논리로 분별하고 있다.
마치 목적지로 가는 사람이 가는 도중에는 도착한 것이 아니고,
도착했으면 더 이상 간다고 할 수 없듯이,
듣지 못하는 것은 들을 수 없고,
듣는 것은 이미 들었으니 더 이상 듣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다.
세존은 마침 도착한 유리광보살의 대답을 통해 그것이 잘못된 분별임을 알리셨다.
여래의 법이 중생을 포섭하고 중생 속에 여래의 법이 잠재한다는 것,
이것이 곧 <유마경>의 불이(不二) 법문이고, <반야경>에서 설하는 공한 이치이다.
이 이치를 깨달으면, 여래께서 열반하시되 열반한 것이 아니며,
당도하지 못하는 곳에 당도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포천 정변지사 주지 용하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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