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하스님의 열반경 이야기]
- <31> 어떤 기대도 생각도 없는 한결같은 실천 -
보시가 아닌 보시바라밀
달라는 이 있음을 보고 주는 것은 보시
달라는 이 없는데 스스로는 건 바라밀
그럼에도 의식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보시를 보시바라밀이라고 하지 못하고,
어떤 보시를 보시바라밀이라 이름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보살이 방등 대반열반을 수행할 때는 보시를 듣지 못하고,
보시를 보지 못하면, 보시바라밀을 듣지 못하고 보시바라밀을 보지 못한다.
보살이 대열반을 닦으면 법계를 알고 보며 실상을 이해하여,
공하여 있는 것이 없고 화합하여 깨닫는다는 상(相)이 없으며,
무루(無漏)의 상과 짓는 일이 없는 상과 환술과 같은 상과
더울 때의 아지랑이 같은 상과 건달바성 따위의 비고 공한 상을 얻게 될 것이다.
보살이 이러한 상을 얻으면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없어서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할 것이며,
이것을 일러 보살마하살의 진실한 모습이며 실상에 머문다고 한다.
보살이 그때는 이것은 보시이며 이것은 보시바라밀이며,
나아가 이것은 반야이며 이것은 반야바라밀이며,
이것은 열반이며 이것은 대열반임을 스스로 알게 된다.
무엇을 일컬어 이것은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라고 하는가?
달라는 이가 있음을 보고 나서 주는 것은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며,
달라는 이가 없는데 마음을 내어 스스로 주는 것은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만일 때때로 주는 것은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지만,
항상 주는 것은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만일 다른 이에게 주고 나서 도로 후회하는 마음을 내면 이것은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지만,
주고 나서 후회하지 않으면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만일 과보를 희망하여 주는 것은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고,
주고도 갚음을 바라지 않는 것은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만일 공포나 명예나 이익이나 집의 규모를 상속하거나 천상의 5욕락을 위한다면,
그것은 교만을 위하는 것이고, 타인을 이기기 위한 것이고,
자기 사람만을 위하는 것이고, 오는 세상의 과보를 위하는 것이니,
이것은 시장에서 장사하는 법과 다름이 없다.
선남자야, 이것은 마치 서늘한 그늘과
꽃과 과실과 재목을 얻기 위하여 사람이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만일 이런 보시를 행한다면, 그것은 보시라고 이름하지만, 바라밀은 아니다."
- <대반열반경> 제21권 ‘광명변조귀덕왕보살품’에서
보시는 실생활에서 아집을 털어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보살이 실천하는 여섯 가지 바라밀 가운데서 제일 앞자리에 자리한다.
용수보살의 말을 빌자면, 보시는 “열반의 첫 인연이자, 열반에 이르는 나루터이며,
칭찬과 명예를 받는 중심이며, 대중 속에서 곤란함이 없게 되는 공덕이며,
복락의 과보를 완전하게 보호한다.”
<대반열반경>에서는 다시 보시와 보시바라밀을 구별하여,
어떤 과보에 대한 기대도 없고, 보시라는 생각조차 없으며,
한결같은 실천에 이르러야 비로소 보시바라밀이라고 설한다.
어떤 경우 보시를 했는데도 괴로운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식적으로라도 보시를 실천해야 한다.
먼저 나루터에 닿지 않고 어떻게 열반(깨달음)에 도달하는 배를 탈 수 있겠는가?
만약 보시로 인하여 괴로움이 생긴다면,
나의 행위가 보시인가 아니면 보시바라밀인가를 생각하자.
그 생각이야말로 곧 반야(지혜) 바라밀이며, 보시바라밀의 싹이다.
포천 정변지사 주지 용하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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