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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

- <45> 의심하지 않는 것이 의심이다 -

by 수선화17 2024. 2. 2.

[용하스님의 열반경이야기]

- <45> 의심하지 않는 것이 의심이다 -

 

명료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한다

앞의 의심은 명료치 못함에 대한 사유의 의심

뒤의 의심은 결정된 생각에 기댄 단견 의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예컨대 여래가 어느 때는 ‘열반에 든다’고 말하고

어느 때는 ‘열반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은 ‘여래께서 결정코 열반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라고 하거나,

어떤 사람은 ‘여래께서 결정코 열반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라고 말한다.

이런 쟁론은 부처님 경계라서 성문이나 연각은 알지 못한다.

만약 그때 누군가 의심을 낼지라도,

오히려 수미산같이 한량없는 번뇌를 능히 부수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이 결정된 생각을 내게 된다면,

이것을 집착이라고 한다.”

 

가섭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집착이라고 합니까?”

“이 사람은 타인의 말을 듣거나, 스스로 경을 찾아보거나,

또는 타인의 가르침을 받을 때도 결정되었다는 그 생각을 놓아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집착은 선입니까, 선이 아닙니까?”

“이런 집착은 선이라고 하지 않는다.

모든 의심의 그물을 깨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결정된 생각을 내는 이는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 것인데,

어찌하여 의심을 깨지 못한다고 합니까?”

“선남자여, 무릇 의심하지 않는 것이 곧 의심이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수다원의 과를 얻은 자는 3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사람도 집착이며 의심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의심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마치 어떤 이가 전에 사람과 나무를 보고,

그 후 밤중에 저 멀리서 나무등걸 윤곽을 봤을 때

문득 그것이 사람인가 나무인가 의심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모든 중생이 먼저 두 물건을 보고

나중에 의심을 내는 것은 마음으로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또한 수다원을 두고 3악도에 떨어지기도 하고 떨어지지 않기도 한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이 사람이 어찌 의심을 내겠느냐?”

 

“부처님께서 ‘먼저 본 뒤에야 의심한다’고 하셨는데,

두 가지 물건을 보지 않고도 의심을 내는 경우가 있으니, 이른바 열반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길에서 탁한 물을 만나면 그 속을 미리 보지 않았지만,

이 물이 깊은지 얕은지 의심합니다.

이 사람은 아직 물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는데 어찌 의심을 내는 것입니까?”

 

“선남자여, 열반이란 괴로움을 끊는 것이며, 열반 아닌 것은 곧 괴로움이다.

모든 중생은 두 가지를 보니, ‘고(苦)’와 ‘비고(非苦)’이다.

고ㆍ비고란 추위와 더위, 성냄과 기쁨, 병듦과 안온, 늙음과 건장함,

속박과 벗어남 등을 겪는 것이다.

중생이 이것을 보고 ‘이런 괴로움을 멀리 여읠 수는 없는가?’라는 의심을 내고,

그런 연유로 열반에 대해 의심을 낸다.

그대가 말하기를 저 사람이 먼저 물을 보지 못하고도 의심한다고 했는데, 그렇지가 않다.

그는 먼저 다른 데서 본 바가 있으므로, 아직 이르지 않은 여기에서 의심을 내는 것이다.”

“그가 전에 깊고 얕은 데를 보았을 땐 의심이 없는데, 지금은 어째서 의심을 냅니까?”

“본래 다녀보지 않은 곳이므로 의심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명료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한다’라고 말하였다.”

 

- <대반열반경> 제35권 ‘가섭보살품’에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 곧 의심이다”라는 말씀에서,

앞의 ‘의심’은 명료하지 못함에 대한 사유의 의심이고,

뒤의 ‘의심’은 결정된 생각에 기댄 단견의 의심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정한 ‘의심’을 한다면, 결코 결정된 생각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의심하지 않는 의심”이 대개 그러하다.

 

용하스님/포천 정변지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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