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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

- <25> “일상의 모든 일들을 인과작용의 흐름으로 보라” -

by 수선화17 2024. 3. 28.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신심명 강설]

- <25> “일상의 모든 일들을 인과작용의 흐름으로 보라” -

 

제47화 꿈 해몽

본문

안약불수(眼若不睡)

제몽자제(諸夢自除)

눈이 잠들지 않으면

모든 꿈은 저절로 사라진다.

 

강설

여기서 말하는 눈은 내 몸의 눈이 아니라 깨어 있다는 의미이다.

또 여기서 말하는 꿈은 자면서 꾸는 꿈이 아니고,

분별하면서 사라지는 일상의 현상을 말한다.

 

분별하지 않고 마음이 그대로 깨어 있으면,

보고 듣는 모든 현상이 있는 그대로 명쾌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게 된다.

 

즉, 좋고 나쁨을 분별하지 않으며, 즐겁고 괴로움을 분별하지 않으며,

이득과 손해로 분별하지 않으며, 친하고 멀리함을 분별하지 않으며,

예쁨과 미움을 분별하지 않는다.

또 잘되고 못되고 분별하지 않으며, 이루고 못 이루고 분별하지 않으며,

아름답고 추함을 분별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깨어 있는 것이 되므로,

고락(苦樂) 시비(是非)의 인과(因果)가 없다.

 

오늘도 많은 일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보는 시선들이 정반대로 어긋나 있음에,

시각에 따라 좀더 나쁘게 보는 측이 있는가 하면,

좀 더 정의로운 측이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이 모든 현상을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 구분하여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집단과 집단의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역시 일종의 공업(共業)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한 집단이 평화로운 때가 있으면,

그 집단이 평화롭지 못한 때의 인과(因果)가 있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짚어 보자면, 이는 각자의 몫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공업(共業)이든 개인업(個人業)이든

모두가 인과(因果)의 현상이 과보(果報)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각자 스스로가 편안하다면 아무 일도 없는 것이 되고,

현상을 보고 불편한 이가 있다면,

이는 순전히 불편하게 보는 그 사람의 업(業)이 스스로 작용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종교단체이든, 사회 현상이든, 정치이든, 경제이든, 세계이든,

벌어지는 이 모든 현상을 보는 사람의 마음상태에 따라 스스로 편하느냐,

불편하느냐의 차이로서 이는 각자의 몫이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을 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기 보다,

내 마음안에 사람을 좋게 보는 업(業)이 작용하면서 좋은 사람으로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좋다’라고 하는 인과(因果)로 인하여,

‘나쁘다’라고 하는 과보(果報)가 생기므로, 나쁜 사람이 저절로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분별심(分別心)으로 인하여 좋고 나쁨의 인과(因果)가 계속되며,

이 모든 현상 또한 생로병사(生老病死)하면서 모두가 사라지게 된다.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이를 꿈을 꾸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일상의 모든 일들을 인과작용의 흐름으로 보고,

또 꿈을 꾸는 듯 집착하지 않고 시시비비 하지 않는다.

또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분별(分別)하지 않으며 스스로 깨어 있다면,

마음은 늘 평화로운 중도(中道)의 마음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스스로 컨트롤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기도를 하라.

그리고 참선을 배우라.

또 늘 베푸는 것에 인색하지 말고,

항상 인과(因果)와 분별(分別)에 끄달리지 않도록 정진하라.

 

송(頌)

눈을 감는다고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분별하는 모든 것이 꿈이다.

어느 순간 어느 때에도 분별하지 않으면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좋고 나쁨이 없다.

 

제48화 누구의 말을 들을까

본문

심약불이(心若不異)

만법일여(萬法一如)

마음이 만약 다르지 않으면

만 가지 법이 한결같다.

 

강설

이 구절도 분별(分別)에 대한 내용이다.

부처님께서 45년간 장광설(長廣舌)을 <화엄경>, <금강경>, <아함경>,

<법화경>, <열반경>의 오교시(五敎時)를 통해 중생에게 깨우침을 가르쳤으나,

이 모든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결국 분별심(分別心)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분별은 인과(因果)를 낳고, 인과는 윤회(輪廻)를 낳는다.

즐거움 하나에 괴로움 하나요, 기쁨 하나에 슬픔이 하나요, 행복 하나에 불행이 하나요,

태어남 하나에 죽음이 하나요, 젊음 하나에 늙음 하나요, 배고픔 하나에 배부름 하나요,

좋은 것 하나에 나쁜 것 하나다.

결국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는 것이다.

 

다만, 한가지가 나타나면 다른 하나가 나타나는 공간(장소)과 시간이 다를 뿐이다.

즉, 젊음의 시절과 늙음의 시절이 다르고,

좋은 시절의 인연과 나쁜 시절의 인연이 서로 다를 뿐이다.

하지만 한쪽의 질량과 다른 반대쪽의 질량은 같다는 말이다.

이를 인과(因果)라 한다.

 

책임을 지는 자리에 있으면 결정할 일이 그만큼 많아진다.

한쪽에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저렇게 하는 것이 좋다’하며,

양쪽 모두 자기들의 의견을 압박하는 일이 많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결정하는 자리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많은 고민을 할 것이다.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에서 난리가 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럴 때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물론 내공(內功)이 받쳐 주어야 한다.

즉, 분별(分別)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인과에 대한 굳건한 신심(信心)으로서 용기가 있어야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던 결과에 대해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분별(分別)하지 않음으로써

시시비비(是是非非)의 마음이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상관이 없다.

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마저 분별하지 않고,

다음에 벌어지는 일 또한 분별(分別)하지 않으면 그뿐이다.

 

이에 대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또한 각자 스스로 분별(分別)하는 마음에 의해 고락(苦樂)의 인과가 생겨나는 것이다.

엄밀히 따진다면 나와는 무관한 일이 된다.

각자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설사 분별심이 일으켜 좀 더 욕심나는 쪽으로 선택한다면,

인과(因果)의 과보(果報)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아 두면 된다.

좋은 것만큼의 나쁜 과보(果報)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억지로 선택했다면,

그만큼의 좋은 과보(果報)가 언제 어디서든 반드시 생기게 될 것이다.

그래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는 총합이 똑같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해 믿지 않기 때문에 항상 걱정이 앞선다.

이에 대한 굳건한 신심(信心)은 용기를 낳게 하고,

자신감을 가지게 하며, 늘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한다.

따라서 어떤 문제에 대해 굳이 고민할 것이 아니라,

걸림없고 거침없는 무분별심(無分別心)을 가지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분별(分別)하지 않는 심약불이(心若不異)의 마음이 되면,

만법일여(萬法一如) 즉,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해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을 가지려 해도 업(業)이 워낙 두터워서 의지만으로는 잠재울 수 없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고, 참선을 해야 하며, 보시와 정진이 뒤따라야 한다.

 

송(頌)

상대의 말에 대해 분별하지 말라.

상대의 행동에 대해 분별하지 말라.

상대의 생각에 대해 분별하지 말라.

나의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도 분별하지 말라.

 

[불교신문 3781호/2023년8월15일자]

총무원장 진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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