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신심명 강설]
- <27> “집착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면 열반적정(涅槃寂靜)” -
제51화 어려운 부탁을 할 때와 받았을 때
본문
민기소이(泯其所以)
불가방비(不可方比)
그 원인 되는 바를 없애면
견주어 비교할 수 없다.
강설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 또는 ‘이루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한다면
하고 싶은 것을 이루는 데에는 반드시 장애가 있다는 뜻이 된다.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에 따르는 장애가 없다면
‘하고 싶고 이루고 싶다’ 라는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다.
만약, 하고 싶은 생각이나 이루고 싶은 생각이 본래 없다면,
애초에 장애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원인이 되어 하고 싶은 것에 장애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를 인과(因果)의 법칙이라 한다.
따라서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라고 하는 생각을 한다면
‘이렇게 하면 안되지’, ‘저렇게 하면 안되지’ 라는 생각도 동시에 생겨나는 것이므로,
이렇든 저렇든 모두 인과(因果)라는 장애에 걸리게 된다.
사람들은 고락(苦樂)의 분별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악순환을 거듭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지만 편하다는 것은
바로 불편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원인이 된다.
따라서 편함과 불편함은 바로 동전의 양면과 같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편한 생각이든, 불편한 생각이든,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고락(苦樂)의 인과에 걸려 과보(果報)를 받으므로
결국 고통과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다 하셨다.
그래서 생각을 비우고, 감정을 비우고,
마음을 비운다면 원인이 없어지므로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상반된 두 가지 고락(苦樂)의 분별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원하는 것이 없으면 원하지 않는 것도 없다.
성공을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실패할 염려도 없다.
‘이렇게 해야지’ 하는 바람이 없으면 ‘저렇게 되면 안되는데’ 라고 하는 걱정도 없다.
부탁하는 이들도 많다.
그 부탁을 들어주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선택의 기로에 설 때도 있다.
하지만 가능하면 들어주고 가능하지 않으면 억지로 들어주려고 할 것도 없다.
들어주어도 별다른 마음이 없고,
들어주지 않아서 ‘원망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도 없다.
눈치도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뭐라고 좋지 않은 말을 하거나,
좋지 않게 대하기도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이렇게 하더라도 고락(苦樂)의 원인을 짓지 않는 것이다.
견주어 비교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 결과에 대해서도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이렇게 해도 마음을 놓고, 저렇게 해도 마음을 놓아 버린다.
다만 인연을 따를 뿐이다.
아니, 인연을 따른다는 생각마저 놓아 버린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 법이고 불교다.
그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은 외도(外道)에 불과하다.
더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더 못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이는 진리도 아니고 옳은 것은 더더욱 아닌 분별(分別)일 뿐이다.
그러니 오늘의 <신심명>의 구절 즉,
민기소이(泯其所以) 불가방비(不可方比)야말로 불교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쇠귀에 경읽기에 지나지 않으니
이는 찌들고 찌든 탐진치(貪嗔痴-탐욕, 성냄, 망상) 삼독심(三毒心)의 업식(業識)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조금이나마 멸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뿐임을 명심해야 한다.
송(頌)
하고 싶은 것은 하고
싶지 않은 과보(果報)를 받고
바라는 것은 바라지 않는
과보를 받아 괴롭다.
바라고 하고 싶다는
원인 된 마음을 제거하면
바라지 않고 하고 싶지 않은
과보 역시 없다.
제52화 경주 최 부자와 같이 되려면
본문
지동무동(止動無動)
동지무지(動止無止)
그침에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따로 없고
움직임에서 그치니 그침이 따로 없다.
강설
하늘은 파랗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구름이 일어나 움직인다.
그침에서 움직인 구름이 사라졌다.
움직임에서 그쳤다.
그침과 움직임은 한 몸이다.
하늘은 파랗게 그대로다.
바다가 잔잔하다.
바람이 그쳤기 때문이다.
다시 파도가 일렁인다.
바람이 일어나 파도가 움직인다.
그리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하다.
바다는 그대로다.
마음은 본래 텅 비어 있다.
감정이 일어나 마음이 움직인다.
감정은 곧 사라진다.
마음은 다시 텅 비어 그쳤다.
감정이 일어났다가 곧 사라지니, 사라지고 일어나는 것이 한 몸이다.
마음은 그대로다.
즐거운 마음이 움직였다.
즐거운 마음은 곧 사라지고 그쳤다.
다시 즐거운 마음이 움직인 인과(因果)로 인해 괴로운 마음이 움직였다.
괴로운 마음은 곧 사라지고 그쳤다.
즐거운 마음과 괴로운 마음이 모두 그쳤다.
그쳤으니 다시 움직인다.
움직였으니 또 그치기 마련이다.
그냥 그런 것이다.
그리하여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한다.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다.
집착하면 일체가 개고(皆苦)요,
집착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면 열반적정(涅槃寂靜)이 된다.
원하고 바라는 만큼 마음은 움직인다.
움직이는 마음은 인과(因果)를 따른다.
한번은 좋고 한번은 나쁘게 된다.
맑은 만큼 흐리게 되고 흐린 만큼 맑게 된다.
그리고 곧 또다시 흐리게 된다.
평양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기분이 좋은 만큼의 인과(因果)에 의한 과보(果報)로 인해
기분 좋지 않은 일이 반드시 생길 것이다.
하지만 평양 감사를 하지 않으면 좋은 기분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과(因果)의 과보(果報)도 발생하지 않아서 기분 나쁠 일도 생기지 않는다.
근자에 높은 자리에서 떵떵거리며
기분 좋은 시절을 만끽한 사람들이 감옥에 많이 들어갔다.
인과(因果)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온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다음 생에 과보(果報)를 받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거지로 살거나 부자로 살거나 아무 상관이 없다.
권좌와 부자는 그저 이름일 따름이다.
높은 자리는 그냥 그 자리일 뿐임에도 스스로 기분을 만끽한다.
그러므로 기분을 만끽한 만큼의 과보(果報)를 받아서
기분이 아주 나쁜 때가 도래하게 된다.
경주의 최부자와 같은 전설적인 사람은
자신이 부자인 것을 뽐내거나 기분을 만끽하며 살지 않았다.
거의 무심한 마음 상태로 살았으니,
좋은 생각과 좋은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온 경우라 하겠다.
그리하여 좋은 일을 많이 했다.
마음을 움직여서 요동을 쳐봐야 그치게 된다.
그친 마음이 다시 움직여봐야 이 또한 그치게 된다.
결국 움직임과 그침은 한 몸이다.
따라서 세상을 움직이는 마음을 가진다 해도 그치게 되어 있다.
남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최상이다.
곧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오만가지 생각도 벗어놓고
그저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 중도(中道)의 마음이 정답이다.
인과(因果)와 인연, 순리(順理)와 불법(佛法)에 간섭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놓고 또 놓고 방하착(放下着)하라는 것이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이다.
송(頌)
하늘은 파랗다.
구름이 생겨났다.
구름은 곧 사라졌다.
다시 하늘은 파랗다.
[불교신문 3783호/2023년8월29일자]
총무원장 진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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