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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들은 귀한 인연들 입니다.
불교 이야기

- <6> “이익이 이익이 아니요 손해가 손해가 아니다” -

by 수선화17 2024. 5. 19.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증도가 강설]

- <6> “이익이 이익이 아니요 손해가 손해가 아니다” -

 

# 제9화 있는 그대로 보라

무죄복무손익(無罪福無損益)

적멸성중막문멱(寂滅性中莫問)

죄와 복이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으니,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거나 찾으려 하지 말라.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거나 취하는 것을 복(福)이라 한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얻는 복(福)은 곧 죄(罪)를 짓는 것이나 다름아니니,

복(福)이 곧 죄요, 죄가 곧 죄(罪)이다.

 

곡식을 얻으려면 벼를 베어야 한다.

이는 벼를 얻기 위해 식물을 죽여야 하므로 살생이 되기도 한다.

또 먹을 수 있으니 복이 된다.

고기를 먹으려면 짐승을 죽여야 하는데,

이는 또 고기를 얻는 것이 되므로 복이라 한다.

그러나 짐승의 생명을 죽이는 것은 죄가 되기도 한다.

 

원하는 것을 가지면 이익이라 한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것을 잃게 되면 손해라 착각한다.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은 없었는데도 말이다.

 

또 원하는 것을 얻거나 이익을 보는 것을 복이라 하여 즐겁고 기쁘며 행복해 한다.

그러나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것은 반드시 인과(因果)의 과보(果報)를 받게 되니,

괴롭거나 슬프거나 불행한 때가 온다.

 

그러니 이익이 있으면 반드시 손해가 있기 마련이니,

이익이 진정 이익이 아니요, 손해가 진정 손해가 아니다.

그러므로 죄가 곧 복이요, 복이 곧 죄가 되며, 죄도 곧 사라지고 복도 곧 사라진다.

그러므로 죄와 복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 이익도 금새 사라지고 손해도 금새 사라지게 되니,

이익과 손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하여, 죄를 짓는데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말고,

복을 짓는데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면,

인연에 의해 자재한 행동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말은, 설사 생명을 죽인다 하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 마음으로 죽인다면,

죽임을 당하는 생명의 업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임으로,

죄와 복을 분별하지 않는 여여(如如)한 중도(中道)의 행동이 된다.

 

또 나에게 있는 돈이나 기타 등등의 것을 잃거나, 뺏기거나, 사라지게 된다면,

이러한 일련의 인연들은 인과(因果) 인연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묻거나 따지거나, 집착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얻거나 빼앗거나 저절로 들어온다 하더라도,

묻거나 따지거나 집착할 이유가 없으니,

이 역시 인과(因果) 인연의 질서에 따라 이루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므로, 죄와 복, 손해와 이익이라는 분별심(分別心)을 갖지 말아야 하느니,

이 모든 거래와 왕래는 인연 질서에 의해 한치 오차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굳이 의문을 품거나, 그 원인을 찾을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뜻이다.

 

하여, 만약 본의 아니게 큰 돈이 나갔다.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돈이다.

아까운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계속 언제 돈이 다시 들어올 것인지 생각을 한다.

생각을 할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다.

 

이러할 때, 먼저 돈이란 본래 내게 없던 것이 생겨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경로로 나가던 인연의 소치일 뿐이다.

만약 뼈를 깎는 노력으로 들어온 돈이 나갔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들어올 때의 기쁨을 즐겼던 인과(因果)의 과보(果報)라는 것을 깨달아서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결국 죄와 복, 손해와 이익은 없는 것이니,

들어오는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나가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빈 마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 적멸(寂滅)한 성품으로서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매사 들고 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마음의 감정을 요동치게 하지 않는 삶이 좋은 삶이다.

 

총무원장 진우스님

[불교신문 3807호/2024년2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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