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증도가 강설]
- 제34화 스님(스승)은 왜 불친절하나 -
사자후무외설(獅子吼無畏說)
백수문지개뇌열(百獸聞之皆腦裂)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뭇 짐승들 들으면 모두 뇌가 찢어짐이라.
강의
사자를 백수(百獸)의 왕이라 한다.
우두머리를 뜻하고 두려운 존재를 말한다.
또 사자후(獅子吼)는 사자의 울음을 말하는데
불교에서는 깨친 이들이 말씀하는 설법을 가리킨다.
정각(正覺)을 이룬 조사(祖師)들의 설법(說法)은,
근기(根機)가 약한 일체중생을 깨우치게 하는 묘약(妙藥)으로서,
여기서 뇌가 찢어진다는 표현은 곧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부수어 없앤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절집에 큰스님들께서는 제자들에게 매우 엄격하고 무섭다.
정(情)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바늘로 찔러도 피도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차디차고 냉정하기가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마음을 깨친다는 것은 분별(分別)하지 않는 것이 가장 핵심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情)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과 부처를 가름하는 척도이다.
유정(有情) 즉, 정(情)이 있으면 중생이고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의 분별이 완전히 없어지면 부처이다.
정(情)은 감정(感情) 덩어리이다.
감정은 좋은 감정과 싫고 나쁜 감정으로 나뉜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감정으로 말미암아,
슬프고 괴롭고 불행한 감정이 인과(因果)의 과보(果報)로 생겨나기 때문에,
이 두가지의 상반된 감정을 모두 갖고 있는 것이 중생이다.
정(情)이 많을수록 슬픔과 괴로움, 불행한 감정이 동반된다.
부모 자식 등 가족에게 정이 많기 때문에 무정(無情)하고
비정(非情)한 감정 역시 같이 따라붙는다.
애정(愛情)이 많을수록 배신감도 크고 증오심도 같이 생기는 법이다.
정(情)은 곧 집착(執着)이다.
정이 많다는 것은 집착하는 마음이 강하다는 것이고,
이는 곧바로 좋고 나쁜 분별심(分別心)으로 이어진다.
정을 주고받음으로써 기쁜 감정, 즐거운 감정, 행복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주고받는 정이 약간이라도 차이가 나면
그 즉시, 슬프고 괴롭고 불행한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어서,
모든 것은 정(情) 때문에 사달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엄격하고 무서운 스승이라 하여 오해를 하면 안된다.
조사선문(祖師禪門)에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 이라는 말이 있다.
덕산스님께서는 누가 법을 물어도 몽둥이로 무조건 30방을 때리고,
임제스님께서는 법을 묻는 그 누구에게도 사자후(獅子吼)와 같이 소리를 지른다.
이는 선지식(善知識)의 입장에서,
선문답(禪問答)으로 거량(擧揚)을 하는 제자들에게 깨침의 소리를 전달하는 과정이다.
근래에 성철 큰스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불호령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제가 모신 서옹(西翁) 종정(宗正)스님께서도 말씀은 비교적 부드럽게 하시고
설법도 자상하게 하시는 편이지만,
냉정하기는 얼음장보다 더할 정도로 정(情)을 주지는 않으셨다.
마음을 깨치기 위해서는 정(情)이라는 분별심(分別心)을
일으키지 않도록 나름의 배려 차원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따라서 선지식(善知識)이나 큰스님들을 대할 때,
인간적인 정(情)으로서 다가서면 서로간의 인과(因果)가 생겨서
고락(苦樂)의 과보(果報)를 받으므로, 절대로 공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신도들은 절에 가서 조금이라도 불친절하게 한다거나,
스님에게 싫은 소리를 듣는다거나 하면,
다시는 그 절에 가지 않고 친절한 스님이 있는다른 절을 찾는 경우가 많으나,
이는 결코 본인을 위해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물론 불사(佛事)를 한다거나 가람(伽藍)을 크게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찾아오는 신도들을 굳이 배척하거나 지나치게 군림하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나,
분명한 것은 스님과 절은 나의 마음을 깨우치게 하는
선지식(善知識)으로서의 대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요즘의 스승과 제자, 스님과 신도 사이의 관계성을 보면,
절 집 고유의 신앙성과 종교성, 순수한 부처님 가르침으로 형성된 불법(佛法)의
공동체 질서가 모두 허물어져 가는 것 같아서 매우 씁쓸한 생각이 든다.
때문에, 최종의 목적은 마음을 깨우쳐서 성불(成佛)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므로,
사사롭게 세속적인 정(情)을 주고받는 인간적인 관계하에서는
마음 깨침의 수행공부에 있어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간의 인과(因果)의 고락(苦樂)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이는 정법(正法)에 있어서
거꾸로 가는 업(業)의 산물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리고 누가 뭐라해도, 과거의 업(業)은 소멸시키고,
미래의 과보(果報)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이다.
나머지 일들은 잘되고 못되고의 집착된 생각을 무조건 버리고,
인과(因果) 인연에 그냥 맡기면 그뿐이다.
총무원장 진우스님.
[불교신문 3819호/2024년5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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