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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

- <19> “항상 마음이 깨어 있어 분별심을 경계해야” -

by 수선화17 2024. 7. 14.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증도가 강설]

- <19> “항상 마음이 깨어 있어 분별심을 경계해야” -

 

제35화 상대라는 나의 그림자에 속지 말라

향상분파실각위(香象奔波失却威)

천룡적청생흔열(天龍寂聽生欣悅)

향상은 분주하게 달아나 위엄을 잃고

천룡은 조용히 듣고서 희열을 내는도다

 

강의

여기서 말하는 향상은 냄새가 나는 코끼리를 의미한다.

코끼리는 백수(百獸)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으로 치는 성스러움을 상징한다.

그러나 코끼리는 아직 땅을 딛고 살아간다.

땅을 딛는다는 것은 곧 욕계(欲界) 육천(六天)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유위(有爲)의 세계를 삼계(三界) 28천(天)으로 나뉜다.

욕계(欲界)의 6천(사천왕천,도리천,야마천,도솔천,화락천,타화자재천)과

색계(色界)의 18천(1,2,3,4선천),

무색계(無色界)의 4천(공무변처,식무변처,무소유처,비비상처처)이 그것이다.

단계를 올라갈수록 더욱 편안한 실재세계이기도 하거니와,

분별심(分別心)이 점점 없어지면서 번뇌와 고통이 없는 마음이 편안한 단계를 만들어 준다.

 

아직 마음의 단계가 낮아서,

수미산(須彌山-도리천)이라는 땅 밑에 발을 딛고 있는 코끼리로서는,

사자후(獅子吼)를 듣고 놀라서 평소의 위엄은 온데간데 없이 달아나니,

향(香)이라는 냄새 즉, 육식(六識)에 정을 두고 집착하며,

분별심(分別心)이 아직 남아 있으므로, 마음 단계가 낮은 하근기(下根機)이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성문, 연각의 단계에서

아직 완전한 깨달음의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에 반하여 천용(天龍)은, 집착의 땅에서 발을 떼고

야마천(夜摩天) 이상의 하늘을 나는 수승한 근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사자후를 듣고서도 놀라지 않고 조용히 그 기쁨을 맛본다는 것이다.

 

천용(天龍)의 마음 단계는 적어도 집착과 정(情)을 떼고

상대적으로 분별심(分別心)이 없기 때문에,

무애자재(無碍自在)의 상근기(上根機)를 갖추고 있으므로,

그만큼 마음이 편안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자의 울음인 사자후(獅子吼)는 부처님의 설법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의 설법을 제대로 알아듣는다는 것은,

듣는 이가 그만큼 상근기(上根機)의 마음 즉,

정(情)과 집착과 분별심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부처님의 설법인 사자후(獅子吼)라는 상징은

아주 특별한 설법이나 울음소리가 아니라,

이러한 소리를 듣는 이의 마음 자세가 이미 깨달음을 이루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그 어떤 모양과 온갖 소리, 그리고 냄새와 맛과 부딪침,

그리고 오만생각 등에 있어서 이 모두가 부처님의 설법으로 감지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천용(天龍)에 해당하는 상근기(上根機)의 마음을 갖추고 있는 이에게는,

어떤 대상을 대하더라도 모두가 부처님의 설법이요, 사자후로 받아들일 뿐이다.

무엇을 보더라도, 상대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맛과 냄새, 부딪침과 생각 등 육근(六根-눈, 귀, 코, 혀, 몸, 생각)으로

감지되는 모든 것에 좋다 싫다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여여(如如)하게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향상(香象)과 같이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고,

상대가 말을 하면 의심부터 하고, 무엇을 보면 마음에 들기도 들지 않기도 하며,

모든 것에 대해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하며,

스스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거듭 반복하면서,

고락(苦樂)의 인과(因果)에 의한 과보(果報)를 받아 불편해하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하며, 괴로워서 힘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며 살아가는데 있어,

상대방의 모양과 모습에 의해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줄 착각하지만,

실은 내 스스로의 감정이 들고 나는 것이니,

이는 향상(香象)과 같은 분별심(分別心)으로 인해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분별(分別)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용(天龍)과 같이 정(情)과 집착과 분별심을 갖고 있지 않다면,

상대의 모든 모양과 모습, 말과 행동 모두가 좋고 싫고 옳고 그름의 분별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설법인 사자후(獅子吼)로 보고 들릴 것이니,

상대라는 그림자에 속아서는 절대로 아니된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이 깨어 있어서 분별심을 경계해야 하느니,

이는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을 통하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총무원장 진우스님

[불교신문 3821호/2024년5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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