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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

- 제40화 생각하기 전에 저절로 움직여야 -

by 수선화17 2024. 7. 27.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증도가 강설]

 

- 제40화 생각하기 전에 저절로 움직여야 -

아사득견연등불(我師得見燃燈佛)

다겁증위인욕선(多劫曾爲忍辱仙)

나의 스승 석가모니께서 연등불을 뵙고 견처를 얻었고

다생 겁토록 인욕선인이 되셨도다

 

강의

연등불(燃燈佛)은 과거세의 부처님이다.

현재불은 석가모니불이고 미래불은 미륵 부처님이시다.

이를 삼세불(三世佛)이라 한다.

석가모니불께서 과거세에 유동보살로 계실 때,

어느 날 연등부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길가에 기다리다가 일곱송이 연꽃을 공양하였다.

이때 연등불께서

“너는 미래세에 석가모니불이라는 부처가 될 것이다” 라는 수기(授記)를 주셨다.

 

또 한가지 이야기는 연등불께서 오시는 길이 진흙 길이어서

엎드려 몸을 밟고 지나가시게 하여 수기(受記)를 받았다는 설이 있다.

이때부터 보살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고 한다.

 

인욕선인(忍辱仙人)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수행을 하고 계실 때

가리왕에게 할절신체(割截身體) 즉, 몸을 난도질당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인욕선인은 일체의 상(相)을 내지 않았으니,

이적(異蹟)이 일어나서 한점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금강경> 제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에 나오는 이야기다.

 

영가스님께서 왜 이 두이야기를 말씀하셨을까?

유동보살이나 인욕선인은 모두 하심(下心)을 상징한다.

한마디로 보살의 마음이다.

그래서 연등부처님께서 수기를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인욕선인은 몸이 절단나는 상황에서도

상(相)을 내지 않았으니 이적의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하심(下心)은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글자 그대로 마음을 내려놓음으로써 분별하지 않는 마음이다.

참선(參禪)을 말한다.

 

생각과 감정을 다 놓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과연 마음을 놓을 수 있기는 한가?

글쎄 저 또한 아직 마음을 확철히 깨치지 못하였으니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부분은 깨친 이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과 감정을 다 놓는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단언컨데 당연히 할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미 증명을 하셨고, 역대 조사(祖師)들께서 증명해 보이셨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고통은 분별심(分別心)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모든 생각과 감정은 고락의 인과로 생긴다는 것 또한 확연히 알았다.

그러니 마음에 베어 있는 찌들고 찌든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의 업(業)과 습(習)을 없애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어떤 이들은 막무가내 따지는 분들도 많다.

정의구현, 민주주의실현, 독재타파, 복지구현, 세계평화, 난민구호,

약자대변, 노동자변호, 자원봉사, 과학발전, 등등..

왜 이렇게 중요한 가치조차 분별로 취급하냐고.

이런 일도 구분하지 않고 선(善)과 정의(正義)를 취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람 구실을 하고 살 것이며,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겠느냐고.

 

물론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상대적인 인과(因果)의 현상에 지나지 않아서

선(善)과 악(惡), 정의와 불의는 항상 같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말이다.

역사적으로도 인과(因果)의 현상은 반복되어 왔고,

극락에서도 고락(苦樂) 시비(是非)가 있으며,

지옥에서도 고락 시비의 인과(因果)는 있다.

 

옳고 그른 것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 스스로 분별의 마음을 갖지 않고,

하심(下心)한 상태에서 중도(中道)의 마음이 되어야

비로소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저절로 움직이게 되는데,

이러한 무애자재(無碍自在) 행이야 말로 진실된 행동이 된다.

 

생각과 감정을 자재(自在)하게 하려면 절대적으로 훈련이 필요하다.

항상 대상에 대해 감정이 끄달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남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의식을 두지 말고

오직 나 스스로가 고락(苦樂) 시비(是非)의 분별심을 갖지 않도록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고락(苦樂)의 인과(因果)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다.

금방석에 앉아 있어도 맘에 안 드는 일은 반드시 생겨난다.

천사들이 모여 있어도 싫은 감정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에서도 싸움은 있다.

 

끝없이 반복되는 생각과 감정을 조어(調御)하려면,

생각과 감정으로서 생각과 감정을 조어할 수 없는 법이니,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기도, 참선, 보시, 정진 밖에는

달리 특별한 길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총무원장 진우스님

[불교신문 3823호/2024년6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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