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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

- <22> “현실은 인과에 의해 고락시비가 반복될 뿐이다” -

by 수선화17 2024. 7. 29.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증도가 강설]

- <22> “현실은 인과에 의해 고락시비가 반복될 뿐이다” -

 

제41화 영혼과 정자(精子)이야기

기회생기회사(幾廻生幾廻死)

생사유유무정지(生死悠悠無定止)

몇 번이나 태어나고 몇 번을 죽었던가

삶과 죽음이 아득하여 멈춤이 없도다

 

강의

이번 구절(句節)의 뜻은 유위세계(有爲世界)

즉, 존재론(存在論)적인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반복하고 있다.

동물과 식물적인 것은 생로병사하고, 무생물적인 것은 성주괴공 한다는 말이다.

 

사람을 예로 든다면,

일단 모든 사람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모든 동물과 식물 또한 이와 같다.

그렇다면 죽은 다음은 어떠할까?

일정시간이 지나면 몸은 사대 즉,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흩어질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내 몸을 내 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 나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보통 회자되는 이야기로는 영혼이 된다고 한다.

이 영혼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많겠지만,

불교적으로만 보면 육도(六道-천상, 인간, 수라, 지옥, 아귀, 축생)

가운데 한 곳을 선택하여 머문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슨 기준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일까?

이 또한 보통의 설명으로는 사람으로 살면서

스스로 지은 죄업에 따라 육도(六道) 가운데 한 곳에 태어난다고 한다.

일단 그렇다고 치자.

그럼 짐승세계인 축생을 제외하고 나머지 천상과 수라,

지옥과 아귀는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아직까지 정확하게 실증이 없으니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면 육체가 없어진 상태에서 무엇을 영혼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요즘 USB라는 것이 있다.

손톱만한 디스크에 수천 수만 권의 책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아니 눈곱보다 더 작은 저장소 안에 엄청난 내용의 데이터가 담겨져 있다.

기술이 좀 더 발달하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작은 저장소 안에

지구의 모든 데이터가 영상으로 또는 기록으로 담겨 질 것이다.

이미 그런 것이 나와 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친다면 영혼이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과거에 살았던 모든 내용이 고스란히 영혼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500년 전에 우파니샤드 철학자들은 이미 영혼이 물질이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수억 개의 정자 가운데 단 하나가 수정이 되어 사람으로 태어난다.

한번 사정되는 정자의 수가 수억 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그 정자(精子)의 모습은 눈으로 확인이 안 될 정도로 아주 작은 미세한 물질이다.

그 정자가 거대한 덩치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은 물론이요,

사람의 몸을 소우주라 하듯이 엄청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바로 정자 하나 가운데 모든 과거의 유전자가 들어 있다는 말씀이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영혼이란, 나의 과거의 삶,

또 그 전생의 삶까지 모두 포함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영혼 안에 복과 죄를 스스로 계산하여 어떤 동물 또는,

어느 식물에 들어가서 자기의 몸을 형성시킬 것이라고,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영혼을 불교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한다.

일종의 업(業)과 습(習)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생에 익혔던 내용들이 고스란히 버릇이 되어

특별히 배우지 않더라도 그 습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모든 동물과 식물은 유전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은 사람의 버릇이 나타나고,

승은 짐승의 버릇이 나타나게 되어

자동으로 움직여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영혼은 모든 전생의 데이터가 담겨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좀더 엄밀히 분석하자면 영혼은 고락(苦樂)의 감정을 말하기도 한다.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감정을 배제한다면 아무런 느낌이 없기 때문에

즐거움과 괴로움은 고사하고, 살아 있든,

죽음에 이르든 아무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따라서 영혼은 감정덩어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유정(有情)이라 한다.

그러므로 감정이 아주 격한 이들은 스스로 마음을 지옥같이 만들게 된다.

또 욕심이 많아 매 순간 배가 고픈 이는 배고픈 고통을 받는 아귀지옥을 스스로 만들게 된다.

나머지 육도(六道)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 감정을 어떻게 처리를 하느냐에 따라 육도(六道)를 벗어나기도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그 어떤 모습으로 태어난다 해도

죽기 전에 가졌던 고락(苦樂)의 감정이 그대로 남아서 버릇이 될 것이다.

그리고 고스란히 죽은 영혼으로 옮겨진다고 보면 정확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고락(苦樂)의 감정이다.

고락(苦樂)의 감정은 인과적(因果的)으로 한 치 오차 없이 작용하기 때문에,

사실은 사람으로 태어났던, 아귀, 축생으로 태어났더라도 아무런 상관은 없다.

왜냐하면 즐겁고 괴로운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똑같이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락(苦樂)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한, 육도 윤회(輪廻)는 면할 수가 없는 법이다.

결국에는 이러쿵저러쿵 쓸데없이 고락(苦樂)에 대한 공염불만 하지 말고,

하루빨리 감정을 놓고 또 놓고, 버리고 또 버려서 분별심(分別心) 없는

중도(中道)의 마음으로 바로 이 자리, 이 공간 자체가 편안함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 참선, 보시, 정진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다.

 

총무원장 진우스님.

[불교신문 3824호/2024년6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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