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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

- <31> “마음 단계가 올라갈수록 분별심이 끊어진다” -

by 수선화17 2024. 4. 12.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신심명 강설]

- <31> “마음 단계가 올라갈수록 분별심이 끊어진다” -

 

제59화 여섯 가지 마음

본문

비사량처(非思量處)

식정난측(識情難測)

생각으로 헤아릴 곳이 아니니

아는 것과 감정으로 측량키 어렵다.

 

강설

보고 듣는 것에 좋다, 싫다 등의 감정이 얹혀지지 않으면 그냥 보이고 들릴 뿐이다.

태어나고 죽는 것에 좋다 싫다는 감정을 얹지 않으면 그냥 태어나고 죽을 뿐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보는 것에 감정을 싣고, 듣는 것에 감정을 실으며,

태어나는 것은 좋고, 죽는 것은 싫다는 감정을 싣는다.

 

가끔은 무심(無心)할 때도 있다.

허탈할 때나, 몸에 생기가 없어서 무기력할 때,

또는 이것 저것 모두 포기하고 싶을 때,

이럴 때는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는 듯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지속되지는 않는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등의 감정은 인과(因果)에 걸린다고 했다.

좋은 것만큼의 싫고 나쁜 것이 상대적으로 생기기 때문에,

어느 때는 좋은 일이 생긴다면 그 과보(果報)로 인해

어느 때는 싫고 나쁜 일이 생긴다고 했다.

 

싫고 나쁜 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좋은 것도 없어야 한다.

이를 중도(中道)라 했다.

이 같은 경지의 마음을 가지려면 엄청난 수행을 통해 탐진치(貪嗔痴-탐욕,성냄,망상)

삼독심(三毒心)의 업(業)과 습(習)을 바꾸거나 없애야 한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모습을 크게 여섯 단계로 나눈다.

비교적 좋은 세계의 마음인 천상과 아수라, 인간의 삼선도(三善道)가 있고,

비교적 나쁘고 고통스러운 지옥과 아귀, 축생의 삼악도(三惡道)가 있다.

문제는, 극도로 즐거운 천상의 마음이 있다면,

극도로 괴로운 지옥의 마음도 함께 하기 마련이다.

인과의 법칙에 따라, 한때는 천상의 즐거운 때를 맛보고

한때는 지옥의 괴로운 때를 맛보게 되어 있다.

 

인간의 마음과 아귀의 마음 또한 서로 상대적이다.

욕심을 일으켜 즐거움을 맛본 만큼, 아귀의 배고픔을 맛보게 되어 있다.

이 또한 인과법(因果法)에 따라 서로가 따로 나타나게 된다.

 

아수라(阿修羅)와 축생(丑生) 역시 서로 상대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업보(業報)를 받는 과정으로 짐승이나 아수라는 마음을 닦는 수행과정이

없기 때문에 둘다 서로 약육강식(弱肉强食)만 남아서 시끄럽기만 하다.

 

이 여섯 세계가 물리적으로 있고 없고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므로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 마음이 바로 이 여섯 가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천상과 같이 행복할 때도 있고,

때로는 수라와 같이 마음 시끄러울 때도 있으며,

어느 때는 인간적인 마음이 생길 때도 있다.

마음이 극도로 괴로운 지옥 같은 때도 있고,

아귀와 같은 굶주림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도 하며,

짐승같이 막무가내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보통의 사람들이 느끼는 생각과 감정으로서,

삼선도(三善道)와 삼악도(三惡道)의 마음이 서로 상대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좋은 때의 마음과 싫고 나쁜 때의 마음이 인과적(因果的)으로 번갈아 나타나게 된다.

 

다음으로 이 육도(六道)의 마음을 벗어난 선(禪)의 마음이 있다.

마음을 깨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탐진치(貪嗔痴-탐욕, 성냄, 망상)

삼독심(三毒心)을 버려야 한다.

이때부터 고락(苦樂)의 인과(因果)를 거치지 않고 과보(果報)를 받지 않기 위해

마음 안에 있는 분별심(分別心)을 완전히 없애기 위한 보림(保任)의 기간이라 하겠다.

 

이러한 마음의 단계는 욕계(欲界)와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라는 3계(三界)를 말한다.

삼계를 또 나눈다면 욕계(欲界)의 마음 6단계, 색계(色界)의 마음 18단계,

무색계(無色界)의 마음 4단계를 합쳐서 28단계의 마음이 있다고 했다.

 

그 다음은 완전한 깨침의 세계인 불세계(佛世界), 즉 부처의 단계를 말한다.

바로 성불(成佛), 해탈(解脫), 열반(涅槃), 피안(彼岸),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중도(中道), 진성(眞性), 반야(般若), 화엄(華嚴), 법화(法華), 금강(金剛) 등으로 불린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 마음의 단계가 올라갈수록 분별심(分別心)이 점점 끊어지고,

탐진치(貪嗔痴-탐욕, 성냄, 망상) 삼독심(三毒心)이 줄어들며, 욕심이 사라진다.

따라서 고통과 괴로움도 그만큼 줄어들면서,

마지막 28단계인 비비상처천(非非想處天)의 마음에 이르면 완전한 중도(中道)의 마음이 된다.

고락(苦樂)의 인과(因果)가 완전히 멸해 생사(生死)와 생멸(生滅)이 없어지게 된다.

 

이번 구절은 바로 이러한 경지를 뜻하는 것이다.

도저히 말로서 표현할 길이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으며

감정으로는 더더욱 느끼지 못하는 완전히 별개의 완벽한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모든 중생과 일체의 사람은 이 같은 마음의 경지에 찾아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일같이 육도(六道)의 마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윤회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생각과 감정에 끄달려서 스스로 힘들게 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고락시비(苦樂是非)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아무리 논해봐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알량한 눈높이에서 아는 체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을 깨치지 못했다면 우선 무심으로 기도와 참선, 보시부터 해야 할 것이다.

 

송(頌)

신구의(身口意-말, 생각, 행동)

삼업(三業)으로서 고락(苦樂) 인과(因果)를 만드니

아무리 논해봐야 결론은 허무와 고통 뿐

고락(苦樂) 시비(是非)의 분별(分別)을 놓아야

비비상처(非非想處)를 넘어 안락에 이르리.

 

제60화 팔자와 업(業)

본문

진여법계(眞如法界)

무타무자(無他無自)

법의 세계는 진실하고 여여(如如)하니

남도 없고 나도 없다.

 

강설

중생은 각자의 생각과 감정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락(苦樂) 시비(是非)의 업(業)에 의해 분별(分別)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짐승은 짐승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귀신은 귀신대로 세상을 바라본다.

사람이 물을 보는 것과 물고기가 물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르다.

사람도 사람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과 생각은 천양지차(天壤之差)이다.

 

각자가 보는 관점이 전혀 다를 수는 있으나,

누가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감정으로 보든 간에,

그것은 보는 이의 생각과 감정일 따름이고,

세상의 모든 모습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냥 그대로일 뿐이다.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세상 모든 것은 생로병사(生老病死)하고

성주괴공(成住壞空)과, 생주이멸(生住異滅)하며,

인과(因果)와 인연에 의해 한시도 쉬지 않고 변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 또한 그렇게 보는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진여법계(眞如法界) 즉, 법의 세계는 진실하고 여여(如如-그렇고 그렇게)할 뿐,

좋고 나쁜 고락(苦樂)과 옳고 그른 시비(是非)가 붙을 자리가 없다.

무타무자(無他無自) 즉 나와 남이 어디에 있고, 이것과 저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모든 것은 나라는 존재에서부터 시작된다.

바로 아상(我相)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느끼며, 내가 행동한다.

나의 생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나의 느낌으로만 세상을 느낀다.

생각과 감정은 순전히 각자의 몫이다.

내가 지어 만들고, 나 스스로 좋고 싫고 나쁘고,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스스로 인과(因果)에 의한 과보(果報)를 받아 윤회(輪廻)를 거듭한다.

 

따라서 스스로 짓고 받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을 조금씩이라도 없애는 것이 관건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은 매사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얻는 것에 집착하게 되면 반드시 잃는 현상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얻는 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얻는 것에 집착하게 되면 무조건 얻으려는 생각으로 말미암아 걱정 근심이 생긴다.

또한 잃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걱정 근심이 끊이지 않게 된다.

 

조금 더 얻고 조금 덜 잃지 않으려는 생각이야말로 조삼모사(朝三暮四)일 뿐이다.

얻고 잃는 것에 초연한 마음을 가지고 오고 가는 인연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걱정과 근심이 생기지 않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얻고 잃고 오고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좋고 싫은 감정이다.

좋은 것은 싫은 것을 낳게 되고, 싫은 것은 업습(業習)에 의해

다음에 또 싫은 것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좋고 싫은 고락(苦樂)의 감정에 의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스스로 좋고 싫은 마음의 업에서 발생하여 밖으로 나타나게 된다.

마음 안에 있는 좋고 싫은 분별(分別)심의 업(業)을 멸해야

근본적으로 해결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부자가 되고 권력을 잡고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고 사업에 성공하고 건강하고 횡재하고

이름을 날리고 승진하고 자식이 잘되고 돈을 많이 벌고 등등의 즐겁고 기쁜 일이 생기는 것은

마음에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고락(苦樂)의 업(業)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이렇게 좋은 일로서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만큼 그 인과(因果)로 말미암아

딱 그만큼의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나쁜 일이 반드시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마음의 반은 좋은 기분의 감정을 갖고 있고

마음의 반은 나쁜 기분의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인과(因果)의 업(業)이라고 한다.

수행을 잘하는 스님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집착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바로 좋은 것을 모두 버림으로써 나쁜 과보(果報)를 받지 않기 위함이다.

세상에는 절대로 공짜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천하기 어려운 것은 찌들고 찌들어서

금강석처럼 굳어버린 업(業)과 습(習) 때문에 탐진치(貪嗔痴)

삼독심(三毒心)의 본능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자신의 과거 업장(業障)을 참회하는 마음부터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을 우선해야 한다.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하여 시작해야 할 것이다.

 

송(頌)

세상은 그냥 그대로 일 뿐이니

보고 느끼는 것은 순전히 나의 고락(苦樂) 업(業)이다.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업(業)이니 만큼

나의 업(業)만 없애면 무슨 문제가 있으리오.

 

[불교신문 3787호/2023년9월26일자]

총무원장 진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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