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 스님의 법성게 강설]
- 감정만 얹지 않으면 일체 분별심은 끊어져 -
일체 사라지는데 이름 붙인 그것 영원히 존재한다
생각은 망상깨달음의 길을 3가지로 정리하면
성문승, 연각승, 보살로 나눠3승은 진리 알고 있으나
아직 과거 업의 습기 남은 초견성 상태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니 일체(一切)가 끊어졌다.”
이름을 붙였더니 다른 것이 나타나고 모양을 그리니 미추(美醜-고움과 추함)가 생겼네.
모든 것 감정으로 분별하지 않으면 일체가 평등하여 괴로운 번뇌가 사라졌네.
이름을 붙이고 모양을 생각하는 것은 분별을 조장하는 것으로서, 착각이나 다름없다.
알음알이는 차별과 분별을 위한 수단으로 이름을 붙이고
모양을 그리며 생각하게 되고 감정을 얹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부처를 부처라 하면
중생이라는 분별이 생기기 때문에 부처가 아니게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름하여 부처, 이름하여 중생이라고 하신다.
본래 이름이 이름이 아니고, 이름과 상은 말 통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감정을 얹지 않고 그저 임시로 부르는 것이 이름이라 하셨다.
상(相)이라는 모양 역시 상을 상이라 하면 상이 아니고 다른 상이 나타나게 됨이니,
아름다운 꽃이라는 상을 생각하면 추한 꽃이라는 상이 덩달아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름과 상을 생각할 때 상대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감정을 얹지 않으면
그냥 이름일 뿐이고 그냥 모양일 뿐이므로,
결국 이름과 상이 없는 것과 같아서 일체 모든 분별심이 끊어진다.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지는데, 이름을 붙인 그것이,
모양이라고 생각한 그것이 어디에 영원히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일상에 있어서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가 되어야
업(業)이 사라지고 과보(果報)가 없어져서 괴로움과 고통, 번뇌가 사라지게 된다.
한때는 좋고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이름과 상이 생겨날 수 있겠으나,
이미 그 이름과 상이 생겨났으므로, 상대적인 이름과 상인 나쁘고,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한때가 똑같이 생겨나게 될 것이므로 이와 같이 인과의 순서에 따라
이것과 저것이 생겨나는 것을 과보, 또는 업보라고 한다.
하여, 삶에 있어서 이런 일, 저런 일에 이름과 상을 붙여서 좋은 일, 나쁜 일이라고
분별하고 또 감정을 얹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으니,
그에 따른 고통과 괴로움이라는 과보를 받게 되므로,
함부로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는 이름과 상에 감정을 얹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좋고 싫은, 이쁘고 추한, 좋은 일 나쁜 일, 성공과 실패, 얻는 것과 잃는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젊고 늙고, 등의 상대적인 이름과 상을 지어서는 안 되니,
그에 따른 과보로 고통과 괴로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그저 보고, 그저 듣고, 그저 마음을 놓고 감정을 놓아야 한다.
그러면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일체의 괴로움과 고통이 끊어져서 이름과 상을 아무리 붙여도 그 이름과
상이 아니게 되므로, 항상 평안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증지소지비여경(證知所知非餘境) “마음을 깨쳐야 알 수 있을 뿐,
깨치지 못하면 아는 것이 아니다.”
알려고 해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고 알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야 진정 아는 것이니,
알려고 하는 것은 모자람의 표현이고 알려고 하지 않음은 이미 깨친 마음이라.
안다는 것, 즉 증지(證知)란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진리를 터득하여 깨달음을 이룬 경지라는 뜻이니,
깨치지 못한 다른 차원에서는 알 수도 없을뿐더러,
알아도 아는 것이 아니다.
아직 마음에 걸림이 있고, 아픔이 있고, 가지려는 욕심과 바라는 마음이 있고,
화가 나며, 괴로움이 남아 있으면, 결코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깨달음과 깨침의 방법은 크게 나누어 3가지이고, 깨친 정도로 따지면 두 가지로 구분된다.
집착으로 고통이 생긴다는 진리를 알아서 이를 멸하는 팔정도 즉,
여덟가지 바른 도를 깨우쳐서 이행하는 이를 성문승(聲聞乘)이라고 하는데,
즉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의 진리를 깨친 이다.
또 연기법(緣起法)을 깨달아 무명(無明)이라는 분별심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이것과 저것으로 말미암아 생로병사를 거듭한다는 진리를 깨친 이가 연각승(緣覺乘)이다.
그리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행하여 깨달음을 얻은 보살(菩薩)이 있는데,
여기서 바라밀이란 피안의 경지 즉,
우리가 사는 분별의 차안을 건너 분별심이 없는 니르바나의 세계를 향해 수행하는 것이다.
분별심이 사라졌으니 더 이상의 업보와 과보를 받지 않고
깨달음을 얻은 중생이라 하여 보살이라 이름한다.
아무튼 성문승과 연각승, 보살을 3승(乘)이라 칭하는데,
3승은 깨달은 진리를 알고는 있으나,
습(習)이 남아서 고락(苦樂) 업(業)의 감정을 아직 잘 다스리지 못하는 이를
초견성(初見性)이라고 하고, 3승의 경지를 완전히 깨친 이를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보통의 삶이란 인과가 반복되는 것 이외에 특별한 삶이 아니니,
잘 되려고 하는 마음과 잘되었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만큼
인과의 과보가 생겨 고락의 악순환이 거듭될 뿐이다.
따라서 말 한마디, 행동 한가지, 생각 하나 매 순간 인과의 과보를 생각하여,
매사에 감정을 일으키지 않도록 마음을 살펴봐야 한다.
마음을 깨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는 것이 아무리 많다 해도,
우주를 살 정도의 돈을 가졌다 하더라도 고락의 감정이 있는 한
고통과 괴로움, 모자람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니, 안다는 것,
분별하는 마음 등은 나를 피곤케 하고 힘들게 하는 주범이 된다.
깨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더 쉽다고 했다.
웬만한 일에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놔두고 내 할 일을 그저 열심히 하면 된다.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한 치 오차 없이 움직이는 인연 인과에 대한 간섭이고 욕심이다.
욕심은 부린 만큼에 따라 걱정 근심 미련 집착의 과보를 낳을 것이니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일상의 생활이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모두가 인과 인연 따라 되는 것이므로
인과의 이치를 늘 잊지 말며 감정을 함부로 일으키지 않도록 화두 삼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762호 / 2025년 1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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