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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

- 송강 스님의 반야심경 강설 <1> -

by 수선화17 2025. 11. 25.

[ 송강 스님의 반야심경 강설]

- “본성의 ‘큰 거울(大圓鏡智) 같은 지혜’가 드러난다면…” -

 

대부분 외우고 있는 반야심경에 만족한다.

경에서는 외우지 말고 건너가라고 강조하고 있는데도

그저 외우는 것이 자랑인 시대인 것이다.

문제를 푸는 가장 기본은 원류를 찾아가는 것.

불교의 원류는 무엇인가?

 

제1강 시작하며1968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범어사에서 수련대회를 하면서 당시 범어사 유나를

맡고 계셨던 은·법사(恩法師)이신 한산당 화엄대선사께 <반야심경>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

“망망대해 이 고해(苦海)에서 반야(般若)라는 배를 타고 저 적멸(寂滅)의 세계로 건너간다.

마음이 허공처럼 텅 비었으면 반야와 하나가 되어 무사히 거친 바다를 건널 것이나,

한 생각이라도 엉뚱한 생각이 일어나면 파도가 삼키고 말 것이다….”

 

교학(敎學)으로만 알고 있던 반야심경을 선사들은 이렇게 풀이하시는구나 하고 그때 처음 알았다.

이후로 불교학생회에서 신입생 후배들에게 가르쳐주던 반야심경의 해석을 달리하게 되었고,

출가 이후 직접 전문적인 수행을 거친 후에는

반야심경 법문요청을 받으면 수행적인 측면에 치중하게 되었다.

그래서 늘 “모두가 다 외우는 반야심경이나 외우는 그 자체로

반야바라밀은 어림도 없다”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1980년대 서울의 꽤 유명한 거사림회에서

수차례 특별법문을 요청하기에 반야심경을 강의하겠다고 했더니,

누구나 다 아는 반야심경이 아닌 좀 더 수준 높은 법문을 해달라고 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불자들의 반야심경에 대한 선입견이다.

누구나 다 외우고 있는 아주 쉬운 경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미타사 주지를 하던 1990년대에 모 단체가 방문법회를 하고 싶다기에 허락을 했었다.

그들은 내게 법문을 청하지도 않았고,

자기들끼리 ‘반야바라밀’을 진언 외우듯 읊조리고만 있었다.

나는 그저 쓴웃음만 짓고 말았다.

 

시절이 좋아서인지 지금은 반야심경에 대한 해설서가 엄청 많아졌다.

그에 비해 반야심경에서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는 이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된다.

대부분 외우고 있는 반야심경에 만족해 있는 것 같다.

경에서는 외우지 말고 건너가라고 강조하고 있는데도 그저 외우는 것이 자랑인 시대인 것이다.

 

문제를 푸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원류를 찾아가는 것이다.

불교의 원류는 무엇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석가모니부처님이시다.

2500년이 넘는 불교의 역사에서 불교집단(교단, 승단)에 문제가 생긴 경우를 살펴보면

대개 석가모니부처님의 수행지침으로부터 멀어졌을 때였다.

특히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출가 수행자들이 석가모니의 삶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하면서 문제가 커진 것이 사실이다.

 

석가모니의 삶을 크게 나누면 깨달음을 위한 수행기간과 깨달음 뒤의 중생제도(교화)이다.

수행기간에 교화한 예는 보이지 않는다.

35세가 되던 때까지의 고타마 싯다르타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는 화두(話頭. 큰 의심)와 씨름하던 시기였다.

12세가 되던 무렵 시농제(始農祭)에 나아가 생태계의 참혹한 약육강식의 실상을 관찰하였고,

농민의 심한 노동과 일반인들의 힘든 삶도 목격하게 되었다.

비록 어린 시절부터 제왕학(帝王學, 왕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학문)을 공부하면서

세상의 학문을 두루 섭렵했으나 생사를 벗어나는 방법은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싯다르타는 카필라성의 숲으로 들어가 나무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사색에 잠겼다.

한 번 앉으면 모든 것을 잊을 정도로 몰입했지만,

사유(思惟)의 힘으로도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할 수는 없었다.

29세까지 지속된 이 모습은 미륵반가사유상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2001년 파키스탄 정부초청으로 순례를 할 때

페샤와르박물관에서 ‘태자사유상’을 친견했는데, 바로 미륵반가사유상이었다.

 

라훌라가 태어나자 밤중에 성을 넘어 삭발 출가했는데,

처음 찾아간 집단이 고행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사후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고행한다는 말을 듣고 바로 떠났다.

다음으로 찾아간 이는 요가선정의 대가였던 알라라 깔라마(Alr-Klma)로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즉 선정에 들었을 때 일체의 존재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는 경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목표로 삼았던 해탈(解脫)의 경지가 아니었다.

 

다음으로 만난 더 높은 요가선정의 대가는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maputta)로

이곳에서 터득한 경지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었다.

이 선정에 들어있을 때는 욕망이나 물질의 영향을 받지 않지만

미세한 생각이 남아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 또한 싯다르타가 목표로 삼았던 절대자유의 해탈경지는 아니었기에 곧바로 떠났다.

 

그 다음이 우리가 흔히 언급하는 6년간의 극단적 고행이다.

그것을 표현한 것이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에 있는 싯다르타고행상이다.

하지만 그 고행에도 불구하고 싯다르타는 깨닫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다.

생각건대 싯다르타는 업(業)을 소멸하기 위한 고행에 치중하였거나,

밖으로부터 깨달음의 빛이 들어오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6년의 고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사해탈(生死解脫)의

원인을 찾지 못했음을 스스로 알게 된 것이다.

 

싯다르타는 극단적인 고행을 버렸다.

타락했다는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회복을 한 후,

싯다르타는 강을 건너 지금의 부다가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보리수(pippala) 아래 죽음을 각오하고 홀로 앉아 선정에 들었다.

이번에는 오로지 생사윤회의 근원을 파고들었다.

그때 싯다르타는 가장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관념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마왕 파순이었다.

파순은 자신의 내면에 은밀하게 숨어있던 잘못된 욕망의 종류들이었다.

즉 마왕파순의 군대와 아들딸로 표현되는 세속적인

욕망·혐오·기갈·애욕·나태·공포·의혹·위선·고집 등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것들이었다.

 

싯다르타는 선정(禪定)이 깊어져 최고의 멸진정(滅盡定)에 이르고,

열 가지 바라밀의 힘이 드러나면서 온갖 심리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해탈(解脫)을 가로막고 있던 은산철벽(銀山鐵壁)은 가장 깊은 인식의 창고(心王) 속에 있었다.

이것이 전환되면서(轉變) 비로소 본성(本性)의 ‘큰 거울 같은 지혜(大圓鏡智)’가 드러났다.

청정자성을 만나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이 되신(見性成佛) 것이다.

 

소년시절 모든 학문을 다 성취하였고 세속의 모든 것을

갖추었던 싯다르타로서의 삶은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 오직 수행뿐이었다.

우리가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는 수행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 까닭이다.

늪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 벗어나지도 못한 채로

곁에 빠진 다른 사람을 도우려들면 둘 다 더 빨리 죽게 된다.

자신부터 빨리 벗어난 뒤에 도구(방편)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구해야 한다.

오늘날 불교의 위기는 출가자가 적다거나 신자가 줄어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점차 수행과 멀어지면서 세속적인 것에 관심이 옮겨지는데 있는 것이다.

 

송강스님은…

1976년 부산 범어사에 한산 화엄선사를 은사로 득도했다.

화엄, 향곡, 성철, 경봉, 해산, 탄허, 석암 큰스님들로부터 선교율(禪敎律)을

지도받으며 수행했고, 범어사불교전통강원과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했다.

BBS불교방송과 BTN불교TV 등에서 ‘자비의전화’와 기초교리강좌 등을 진행했고

불교신문에 ‘백문백답’과 ‘다시보는 금강경’, ‘벽암록 맛보기’ 등을 연재했다.

현재 서울 개화사에서 기초교리부터 선어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강좌를 진행하며

차, 향, 음악, 정좌, 정념 등을 활용한 법회를 통해 마음치유와 수행을 지도한다.

 

[불교신문 3854호/2025년1월14일자]

서울 개화사 주지 송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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