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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

- <34> “기억과 느낌의 모든 것은 현실에 그대로 반영” -

by 수선화17 2024. 4. 18.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신심명 강설]

- <34> “기억과 느낌의 모든 것은 현실에 그대로 반영” -

 

제65화 귀신을 생각하면 귀신이 나타난다

본문

무재부재(無在不在) 시방목전(十方目前)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

온 세상이 바로 눈앞이다.

 

강설

<금강경(金剛經)>에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라 했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니 없고,

현재는 지금이라고 하는 즉시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없다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보고 느끼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억하고 느꼈던 것들이 착각으로 나타난 허상들이라 할 것이다.

이는 내 마음안에 기억된 것들이 허상(虛像)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인데

바꾸어 말하면 내 마음안에 없는 것은 허상 마저도 나타날 수가 없다.

 

좋다는 기억으로 인해 좋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싫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싫은 것이 나타난다.

행복하고 불행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행복한 일과 불행한 일이 생겨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을 느끼고 죽음이라는 생각으로 말미암아 죽음도 다가온다.

 

기쁘다는 느낌을 아니까 기쁜 것이 나타나고

슬프다는 것을 인식하므로 슬픈 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만난다는 생각이 있으므로 만나게 되고

이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이별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또한 사라지고 없어진다.

즉,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결국은 모두 남아있지도,

존재하지도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과 저것의 두 종류의 상반된 것이

마음 안에 기억되고 있기 때문에 착각의 허상일지언정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모든 이는 마음속으로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잘못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잘못되지 않고 잘되어야 한다는 바람이 생겨난다.

이때 이미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하여 잘되는 일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잘못되는 것에 대한 인식의 생각 또한 마음 안에 있으므로

잘못되는 것 역시 현실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 안에 없는 것은 나타나려 해도 나타날 수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마음안에 있는 기억과 느낌의 모든 것은 그대로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므로 이를 관념(觀念)에 따른 인과(因果)라고 하는 것이다.

 

‘좋다 나쁘다’,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하는 분별(分別)이 마음속에 있는 한

아무리 궁리하고 머리를 쓴다 해도 궁리하는 그것, 머리를 쓰는 그것,

이런 생각이든, 저런 생각이든, 그 어떤 생각이든 모두가 현실로 나타나고야 만다.

그러므로 기분 나쁜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기분 나쁜 것이 무엇인지 몰라야 한다.

싫은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면 싫은 것이 무엇인지 몰라야 하며

안 좋은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안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야 한다.

 

아무리 싫은 것을 만나지 않으려 해도 싫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이상, 피할 도리가 없다.

아프지 않으려고 애쓴다 해도 아픔이 무엇인지 아는 이상 아픔을 피할 수가 없다.

죽음을 아는 이상 죽음을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설사 이를 모두 다 안다고 하더라도

그 어떤 것도 모두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여실히 알아야 한다.

무엇이든 집착하는 마음만 없다면

눈앞에 있는 세상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음이 불편할 리가 없다.

그냥 시방목전(十方目前)일 뿐이다.

 

‘좋다 싫다’ 라고 하는 마음의 분별을 없애야 비로소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모든 것이 그대로 눈앞의 모습일 뿐이다.

따라서 ‘싫다, 괴롭다, 고통이다, 아픔이다, 밉다, 나쁘다’라고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져야 중도(中道)의 한량없는 평안한 마음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분별이 사라진 중도(中道)의 마음이 되려면

생각이나 느낌만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다.

첫째는 기도요, 또 첫째는 참선이요, 또한 첫째는 보시이고, 나머지 첫째도 정진이다.

 

송(頌)

마음 안에 좋음이 있으면 좋은 것이 나타나고

마음 안에 싫음이 있으면 싫은 것이 나타난다.

내 마음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생겨나고

내 마음 안에 없는 것은 나타날 수가 없다.

 

제66화 방북(訪北) 제의를 받다

본문

극소동대(極小同大) 망절경계(忘絶境界)

지극히 작은 것이 곧 큰 것과 같으니

상대적인 경계를 모두 잊고 끊는다.

 

강설

호수에 배가 떠 있다.

호수의 수위가 낮아도 배는 그대로 떠 있고

수위가 높아져도 배는 가라앉지 않고 그대로 떠 있다.

배는 감정을 뜻하고 물의 높낮이는 현상을 말한다.

즉 내가 보고 듣는 현상은 크거나 작고 좁거나 넓으며 높거나 낮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는 별개로 좋고 싫고, 즐겁고 괴로운 고락(苦樂)의 감정은

변화와 상관없이 생겨나게 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커도 더 큰 것에 비하면 작아지고

아무리 작아도 더 작은 것에 비하면 커지게 되는 것이 분별심(分別心)이다.

무엇이 크고 무엇이 작다는 것은 상대적인 허상에 불과하다.

잘 사는 사람은 더 잘사는 사람에 비해 가난한 사람이 되고,

명예가 높은 사람은 더 높은 사람에 비해 평범한 범인(凡人)이 된다.

 

따라서 부자가 되었든, 빈자(貧者)가 되었든,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되었든, 평범한 범부가 되었든,

스스로 느끼는 좋고 나쁨과, 즐거움과 괴로움,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없다.

위를 쳐다보거나 밑을 내려다보는 것은 누구나 똑같기 때문이다.

마치 물이 차거나 물이 빠져도 배는 그대로 떠 있는 것과 같다.

 

작은 것에 집착하면 큰 것을 생각하게 되니 불행해지고,

큰 것에 집착하면 더 큰 것을 생각하게 되니 또한 불행해진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집착을 하지 않고 분수를 지켜야,

상대적인 경계를 모두 잊고 비로소 편안해진다.

 

몇 년 전 정부 관계자로부터 조계종 대표로 대통령과 함께

북한을 방문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다른 소임자에게 흔쾌히 양보했다.

만약 방북을 통해 매우 보람되고 기쁘고 즐거움을 만끽했다면 고락의 과보로 말미암아

슬프고 괴로움의 업보가 고스란히 남아 언젠가는 슬프고 괴로운 일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인과의 질서에 따라서 말이다.

그렇다고 가지 않는다하여 고락(苦樂)의 인과(因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고 가지 않고의 문제를 떠나서 분별심(分別心)과

고락(苦樂)이라는 인과(因果)에 끄달리지 않을 뿐이다.

 

이렇듯 문제는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또는 이것을 해야 좋고,

저것을 하면 좋지 않다 라고 하는 상대적인 분별심(分別心)이야말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큰 것을 생각하면 작은 것이 나타나고

작은 것을 생각하면 큰 것이 나타나게 되므로

언제나 이 둘 사이에서 고민과 걱정 근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큰 것과 작은 것을 상대적으로 분별하지 말고

큰 것은 큰 것대로 작은 것은 작은 것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크고 작고의 경계가 따로 있지 않기 때문에

분별에서 오는 고민과 걱정은 모두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 손해를 보면 다음에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마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음에는 또다시 분별하지 않으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믿어야 한다.

인과(因果)를 믿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더 좋거나 더 나쁜 것은 있을 수 없다.

다만 분별심(分別心)이 작으면 작은 괴로움이 오고 분별심이 크면 큰 괴로움이 오며,

분별심이 없으면 괴로움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 저것 모두를 떠나서 분별의 업(業)을 없애려면

그냥 생각만 해서는 절대로 되지 않으니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으로 극복해야 한다.

 

송(頌)

큰 것은 더 큰 것에 비해 작아지고

작은 것은 더 작은 것에 비해 크다.

이렇듯 분별(分別)은 고민과 걱정의 원인이 되니

이것도놓고, 저것도 놓으면 걱정 끝.

 

[불교신문 3791호/2023년10월24일자]

 총무원장 진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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