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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

- <35> “자식이 잘 되어야 한다는 집착 놓아야 한다” -

by 수선화17 2024. 4. 20.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신심명 강설]

- <35> “자식이 잘 되어야 한다는 집착 놓아야 한다” -

 

제67화 자식이 잘 되기를 위한 제언(提言)

 

본문

극대동소(極大同小)  불견변표(不見邊表)

가장 큰 것이 작은 것과 같으니, 그 끝모습을 보지 못한다.

 

강설

이 구절은 큰 것 위에 더 큰 것이 있고, 작은 것 아래 더 작은 것이 있으니,

큰 것도 끝이 없고 작은 것도 끝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한계라 할 수 있는데 위든 아래 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그 끝을 알 수가 없으니,

아니, 끝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끝이 없는 것이다.

 

우주의 끝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끝이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 끝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은 없다.

인간이 만든 분별(分別)의 관념(觀念)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작은 먼지를 작게 부수고 부순다 해도 완전히 없어질 리 만무하다.

 

이를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1부터 시작하여 아무리 세어봐야 무한대이기 때문에 그 끝이 있을 수 없다.

또한 1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도 0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불행도 없다는 사실이다.

행복 위에 더 큰 행복이 있고 더 큰 행복 위에 더더 큰 행복이 있다.

불행보다 더 큰 불행이 있고 더 큰 불행위에 더더 큰 불행이 있다.

따라서 행복의 끝과 불행의 끝이 있을 수 없으니

과연 어떤 것이 행복이고 어떤 것이 불행인가를 가늠할 수가 없다.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찾으면 행복은 불행이 되고

불행보다 더 큰 불행이 있으면 불행은 행복이 되는 것이다.

행복이 따로 존재하고 불행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각자의 마음먹기에 따라 행불행(幸不幸)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의 교훈은 우주의 끝을 알 수 없듯이,

더 작은 미진(微塵)의 끝도 알 수 없듯이, 더 큰 행복도 더 큰 불행 또한 알 수 없다.

그래서 더 좋은 행복, 더 나쁜 불행을 분별하지 말고

행복도 불행도 모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만약 돈이 생기면 기분이야 좋겠으나

‘좋다’ 또는 ‘즐겁다’라는 분별의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인연 따라 오고 가는 과정으로 보고 담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기를 당하거나 도둑을 맞더라도

‘싫다, 나쁘다’라는 마음을 가지거나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이 또한 인연 따라오고 가는 과정의 하나로 보고 담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춘분과 추분에는 해의 길이가 같으나 동지와 하지의 해 길이는 가장 짧고 가장 길다.

그러나 일 년을 통틀어 해 길이를 재어보면

낮과 밤의 길이가 1초도 틀리지 않고 똑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느 때는 들어오고 어느 때는 나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남는 것도 모자라는 것도 없이 똑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붙잡으려 해도 나갈 때가 되면 나가게 되고

나가라고 등 떠밀어도 남아있을 것은 남아있기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나가고 들어오고, 얻고 잃는 것에 대해,

억지로 집착하거나 분별하지 말아야 하느니, 모든 것은 인과(因果) 인연에 맡기고,

이렇게 되면 어떡하나? 저렇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과 집착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하루빨리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마음먹기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식이 잘 되어야 한다’는 집착을 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식은 자식이 가지고 있는 업(業)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잘 되는 것이 돈을 많이 가진다거나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아무리 돈과 권력과 명예를 가졌다 해도 분별과 집착심이 많으면

불행의 업(業)이 커지게 되고 분별과 집착의 업(業)이 없으면

없는 만큼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마음의 집착과 분별의 업을 어떻게 스스로 조절하느냐 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자식의 행복을 위한 진정한 유산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기도하는 법과 참선하는 방법, 보시하는 복록(福祿)과

정진하는 기술을 배우고 또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송(頌)

인간의 관념(觀念)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니

무엇이 처음이고, 무엇이 끝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도 불행도 실체가 없으므로

분별(分別)과 집착을 없애면 관념(觀念)을 넘어선다.

 

제68화 사주와 점, 그리고 인과법(因果法)

본문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다.

강설

있음은 없음이 있기 때문에 있음이요, 없음은 있음이 있기 때문에 없음이 성립된다.

있음이 없으면 없음도 없는 것이 되고, 없음이 없으면 있음이 있을 리 만무하다.

 

<잡아함경>에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무고피무(此無故彼無)라고 했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어져야 저것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이를 연기법(緣起法) 또는 인연법, 인과법(因果法)이라 한다.

 

예를 들어 ‘돈이 없다’ 라고 한다면 돈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없다는 뜻이 된다.

없는 것은 있는 것을 전제로 하여 없다고 하는 것이고,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 된다.

 

이 구절이 말하는 교훈은, 있음이 있음이 아니고, 없음이 없음이 아닌 것이다.

있다는 것은 곧 없어짐을 뜻하고 없음은 곧 있게 된다는 뜻이다.

있다고 하여 자만하지 말고, 없다고 하여 절망하지 말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는 것은 곧 행복이 있다는 말과 같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라고 하는 것은 곧 행복은 없고 불행하다는 뜻이 된다.

이와같이 행복은 불행에 의해 생기는 것이고, 불행은 행복에 의해 생기게 된다.

그래서 행복함으로 인해 불행이 생기고, 불행함으로 인해 행복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를 분별(分別) 인과(因果)라 한다.

 

따라서 행복을 구하면 구할수록 불행의 과보(果報)가 똑같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을 분별하지 않아야 행복에 의한 불행도 생기지 않게 된다.

이런 일이 생기든 저런 일이 생기든 ‘좋다 나쁘다’ 라고 하는

분별심(分別心)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좋은 것이 있는 것은 곧 좋은 것이 없어지고 나쁜 것이 있게 되고,

나쁜 것이 있음은 곧 나쁜 것이 없어지고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것만 택할 수도 없거니와 나쁜 것 또한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각과 감정 그리고 생각과 감정이 나타나는 현상들은 “유즉시무(有卽是無)요,

무즉시유(無卽是有)”이니, 탐하고 집착할 일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점을 보거나 사주를 보는 이들이 많다.

이같은 행위를 하는 신도는 한마디로 절대 불자(佛子)라고 할 수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과법(因果法)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누차 반복 설명했듯이 얄팍한 요령이나 잔머리로 요행을 바라는 것은

그만큼의 욕심을 부린 죄과로 인해 고통과 괴로움의 과보(果報)를 피할 수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요령을 부리는 자 요령으로 망하고 잔머리 쓰는 자 잔머리로 망하며

공짜를 바라는 자 공짜로 망한다.

세상이나 세상을 만드는 마음 모습은 인과(因果)의 인연으로 형성되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므로 인위적인 요령이나 술수로는 절대 바꿀 수가 없다.

 

마음에 고락(苦樂)의 업(業)을 바꾸거나 없애지 않는 한

인과(因果)로 나타나는 현상을 어떤 방법으로든 바꿀 수도 없앨 수도 없다.

따라서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으로 마음의 업(業)을 녹여야

나쁜 일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명심해야 한다.

 

송(頌)

요령을 부려 행복을 구하면

행복만큼의 불행이 닥쳐오고

술수를 부려 업(業)을 속이려 하면

속인 만큼 고통의 죄과(罪過)를 받는다.

 

[불교신문 3792호/2023년10월31일자]

총무원장 진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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