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우리들은 귀한 인연들 입니다.
불교 이야기

- 제70화 눈과 귀는 서로 다투지 않는다 -

by 수선화17 2024. 4. 24.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신심명 강설]

- <36> “고업이 일어날 때에 맞춰서 악연이 발생한다” -

제70화 눈과 귀는 서로 다투지 않는다

본문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이다.

 

강설

사람을 셀 때 한사람 두 사람이라고 센다.

한 사람이라 하면 몸 하나를 가리킨다.

몸에는 수십억 개의 세포가 있고,

눈, 귀, 코, 혀, 몸, 머리 등이 하는 수많은 기능들이 있다.

하나의 몸에 모두가 담겨 연결되어 있음에도 이를 한 사람이라 칭하니

일즉일체(一卽一切)요 일체즉일(一切卽一)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 한 가족이 되고,

한 가족이 모여 한 마을을 이루고, 한 마을이 모여 한 사회를 이룬다.

한 사회가 모여 한 국가가 되고, 한 국가가 모여 오대양 육대주가 되고,

하나의 지구를 이룬다.

지구와 같은 행성들이 모여 태양계와 같은 우주의 한 구성원이 되고,

또 여러 은하계가 모여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다.

이와같이 하나가 곧 모두를 이루고 모두가 모여 하나를 이루게 된다.

이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개체가 하나하나 따로따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모인 가운데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하나가 생겨나는 것이므로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나와 별개일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크게 보면 하나의 몸 안에 눈과 귀가 따로 일수 없고,

코와 입이 따로 일 수 없듯이 가족 간에도,

이웃 간에도 사회나 국가 간에도, 지구와 우주 간에도 서로 따로 일수 없는 것이다.

 

눈과 귀가 서로 싸우지 않고, 코와 입이 서로 싸우지 않듯이 나와 너, 가족간, 이웃간,

국가간, 우주간에도 서로 싸우거나 충돌하는 것은 이치에도 전혀 맞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고통과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다.

 

때문에 남의 탓을 하거나 서로가 시비(是非) 다툼을 하고 하물며 피 흘리는

전쟁을 하는 것은 하나의 몸 안에 있는 오른손과 왼손이 다투는 것과 같고

머리와 다리가 서로 싸우는 꼴과 다름 아닌 것이다.

이 얼마나 모순되는 일인가.

 

인과(因果)의 법칙을 알고, 공(空)의 이치를 알고,

지금 내 앞의 모습은, 내 마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육식(六識 - 눈, 귀, 코, 혀, 몸, 생각으로 감지)으로 비춰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육근(六根)으로 감지되는 현상들이 모두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꿈, 환, 물거품, 그림자같고)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슬, 번개같은) 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설사 남들이 내게 몹쓸 짓을 하여 발가벗겨진다 해도

내 마음에 거리낌과 감정에 걸림이 없다.

고락(苦樂)과 시비(是非)의 분별심(分別心)이 없는 한,

무엇이 대수이고 무엇이 문제라는 말인가.

있는 그대로가 진리이고 여시(如是-그러한),

여차(如此-이와같이)이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보고 불편한 마음을 가진 제3자가 있다면,

이는 당연히 제3자 자신의 불편한 업(業)에 의한 것이므로,

순전히 제3자의 몫이다.

물론 아무렇지 않은 나는 당연히 나의 편안한 업(業)이 작동하는 것이다.

 

내일도 할 일이 많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함정이다.

잘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순간 이미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생기고 만다.

아무리 잘해도 더 잘하는 것에 비해서는 잘못이 되고 있기 때문에

잘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성립하지 않는다.

 

일이 있으면 그냥 하면 된다.

잘해야 한다, 잘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 자체가 벌써 분별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잘못의 분별심을 그때그때 놓고 놓으면 잘하고 잘못하는 마음 모두가

발붙일 수 없기 때문에 행동 하나하나가 중도행(中道行)이요, 보살행(菩薩行)이 된다.

고락(苦樂)의 기분 감정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편안하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를 보는 제3자가 잘잘못을 따진다면,

이는 순전히 제3자 자신의 몫이고 업(業)이며,

고락(苦樂)의 기분 감정 또한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마음 조절이 잘되지 않고 감정 조절이 힘들다 생각하는 이는,

기도의 힘을 빌려야 한다.

욕심에 의해 억지로 기분을 좋게 하려 하거나

밖의 힘으로 행복하려 움직이는 것은 인과(因果)의 업(業)에 걸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분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밖에는 없다.

 

송(頌)

한 몸인 귀와 눈이 서로 싸우지 않고

팔과 다리가 서로 다투지 않듯이

나는 눈과 팔이 되고, 너는 귀와 다리가 되니

시비(是非) 분별(分別)은 서로가 고통이다.

 

[불교신문 3793호/2023년11월7일자]

총무원장 진우스님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