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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

- 제72화 두 부류의 인간 -

by 수선화17 2024. 4. 28.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신심명 강설]

- 제72화 두 부류의 인간 -

 

본문

신심불이(信心不二) 

불이신심(不二信心)

부처님을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고 

둘 아님이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다.

 

강설

신심(信心)은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다.

그러나 부처님을 무작정 믿는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게 해서는 무엇 하나 해결되는 것도 없다.

진정으로 부처님을 믿는 마음은 부처님의 말씀을 충분하게 이해하여 믿어야 하고,

부처님의 말씀 따라 살아가야 한다.

부처님의 말씀이 곧 법(法)이고 이 법을 진실하게 믿는 마음을 신심(信心)이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 즉, 법(法)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생각과 감정 가운데 한가지라도 마음을 내는 즉시

두 가지 마음이 생기는데 이를 분별심(分別心)이라 한다.

또 분별심은 차안(此岸)의 사바세계 일체 모습을 만들어낸다.

 

부처님을 생각하면 중생이 생기고, 극락을 생각하면 지옥이 생긴다.

아름다운 모습은 추한 모습을, 좋은 것을 구하면 나쁜 것도 구해지고,

기쁨은 슬픔을, 행복은 불행을, 짜릿함은 통증을,

맛있는 것은 맛없는 것을 생기게 한다.

 

얻음은 잃음을, 한때 잘살면 한때 못살고,

성공은 실패를 등 인과(因果)는 두 가지 과보(果報)를 동시에 생기게 한다.

이렇게 분별(分別)된 마음으로 그 중에 마음에 드는 한 가지만을 취하려 하거나,

다른 한 가지를 싫어하고 배척한다면 이는 이율배반(二律背反)으로서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신심(信心)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차안(此岸)의 세상은 모두가 허상이기 때문에 결국 공(空)으로 돌아간다.

그 어느 것도 아무런 의미도 없고, 따라서 아무런 소용도 없다.

노력을 많이 하고 애를 써서 사업에 성공을 했다 하자.

고생한 만큼의 대가로 인해 행복감이 충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행복한 마음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사업이 잘되고 안되고는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다.

실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락(苦樂)의 업(業)이

인과적(因果的)으로 언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

낙업(樂業)이 나타날 때가 되면 사업의 성공을 통해서 즐겁고 기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낙업(樂業)이 나타난 인과(因果)의 과보(果報)로 인해,

즐긴 만큼의 괴로운 고업(苦業)이 나타나게 되어 있으니,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든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일이 생기게 된다.

만약 전쟁이 나거나 자연재해가 발생하거나,

911과 같은 대형사고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된다면

이는 고통받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업(苦業)이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고업(苦業)들이 모여 공업(共業)을 이룬다.

 

반대로 평화가 도래하여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기쁨과 즐거움 행복을 느낀다면

이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의 낙업(樂業)이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낙업(樂業)이 모여 공업(共業)을 이룬 것이다.

실제 현상적으로 부딪침이 전혀 없어도 고락(苦樂)의 업(業)을 느낀다.

아무런 상대나 행동없이 혼자 가만히 앉아만 있더라도

어느 순간 낙업(樂業)이 생겨날 시간에는 마음이 즐겁고 행복한 느낌을 가진다.

반대로 어느 순간 고업(苦業)이 생겨나는 시간에는

마음이 매우 고통스럽거나 괴롭고 불행을 느낀다.

 

즐겁고 괴로운 고락(苦樂)의 업(業)은 마음 바깥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업(業)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바로 이 내용을 말씀하셨으니 인과법(因果法)이다.

그러니 마음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필연이요, 여차(如此) 여시(如是)라 했다.

일어날 것이 일어나고 나타날 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일체의 현상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공성(空性)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같은 경계를 보는 내 마음의 업(業)이 문제다.

바깥 경계는 나의 고락(苦樂) 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든 업에 나 스스로가 또다시 끄달려

고락(苦樂)과 시비(是非)의 업(業)을 짓고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이 얼마나 허망하고 안타까운 일인가!

 

오늘도 종단에 여러가지 복잡한 일들이 일어났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는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의견들이 난무하다.

어떻게 하면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인가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은 인과(因果)의 모습으로서,

시절 인연이 도래하여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함정에 빠지면 안된다.

물론 이해 당사자들에게는 큰 일들이 아닐 수 없으나,

각자의 자업(自業)에 의해 나타나는 공업(共業)일 뿐이다.

 

누차 얘기했듯이, 어떤 사안이 발생했다면,

초연한 마음으로 고락(苦樂)과 시비(是非)의 두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복잡하고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이유는 이 사건이 복잡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고업(苦業)이 나타날 시간이 되어 복잡한 일로 생각되는 것이다.

 

세상에 일이 풀리고 안 풀리고는 실제로 풀리고 안 풀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업(業)이 풀리고 안 풀리고 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 시비분별(是非分別)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풀리고 안 풀리고의 두 가지 분별 자체가 없다.

인과 인연 따라 흘러갈 것이다.

억지로 마음을 먹어서는 안된다.

설사 무진 애를 써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 마음이 기뻤다고 한다면

기쁜 마음의 과보(果報)로 인해 그만큼의 슬픈 일을 겪어야 한다.

그렇기에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이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부처님 법을 제대로 믿는 신심(信心)이다.

세상이 무너져도 내 마음의 고업(苦業)이 없으면 고통과 괴로움이 없다.

반대로 세상 모두가 평화롭다 해도

내 마음의 고업(苦業)이 발생하게 되면 괴로움을 면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 고락(苦樂) 시비(是非)의 두 마음 즉 분별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신심이 없으면 그냥 팔자대로 살수 밖에 없다.

고통과 괴로움을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은 신심을 키우는 부모와 같다.

 

송(頌)

세상사람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과(因果)에 끄달려 사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인과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끄달리면 고통이요 받아들이면 안락(安樂)입니다.

 

[불교신문 3794호/2023년11월14일자]

총무원장 진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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