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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야기

- <2>집착 말고 즉시 마음 깨치는 일에 ‘매진’ 하라 -

by 수선화17 2024. 5. 5.

[총무원장 진우스님의 증도가 강설]

- <2>집착 말고 즉시 마음 깨치는 일에 ‘매진’ 하라 -

 

군불견(君不見)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배움이 끊어져 함이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앨 필요 없고 참됨도 구할 필요가 없구나.

 

군불견(君不見) -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아직 마음을 깨치지 못하였는가.” 라는 꾸짖음이다.

바꾸어 말하면 “아직도 괴로움이 남아 있는가” 라고 힐난하는 말이다.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

“배움이 끊어져 함이 없는 한가한 도인” 이란,

마음을 깨치고 나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기에 무엇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으니,

하릴없는 한가로운 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

“망상도 없앨 필요 없고 참됨도 구할 필요가 없구나.”

망상을 피우지 않으니 없앨 것도 없거니와,

참됨 역시 굳이 필요가 없으니 구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마음을 깨친다는 것은 첫 번째로 인과(因果)의 도리를 아는 것이다.

인과(因果)란 원인을 지으면 반드시 결과가 생겨난다는 것이니,

욕심을 한번 내어 즐겁고 기쁘고 행복했다면,

그 과보(果報)로 인하여 언젠가는 똑 같은 질량(質量)으로

한번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것이 반드시 생긴다는 것이다.

 

이 도리를 깊이 알아채고 깨친 이는,

결코 즐겁고 기쁘고 행복을 구하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으니,

괴롭고 슬프고 불행한 인과(因果) 또한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좋고 나쁜 분별(分別)된 망상(妄想)을 부리지 않으니,

분별 망상을 없앨 것도 없거니와,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이라는 분별(分別) 또한 없으므로,

굳이 참됨을 구할 필요가 전혀 없음이다.

 

그러니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라고 하는 분별된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따질 것도 없고, 계산할 것도 없으므로,

때와 장소를 가릴 것 없이 이런들 저런 들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마음은 늘 한가로운 상태로서, 걸림 없는 깨침 그 자체이다.

 

바다는 본래 늘거나 줄지 않는다.

다만, 바람 불어 파도 일렁일 뿐이고,

눈비 오고 수증기 하늘로 올라가 구름 되어 또 다시 떨어지고를 거듭할 뿐이 듯,

조금 욕심 내면 조금 과보(果報)를 받고, 크게 욕심 내면 크게 과보(果報)를 받게 되나,

그렇다고 결코 마음은 늘지도 줄지 않으니,

인과(因果)가 오고 가고, 들고 나는 것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

굳이 간섭하여 인과의 놀음에 말려들 필요가 없고, 마음 상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일상의 생활에 있어서 만약, 사람 때문에 속상하거나,

교통사고가 나서 몸을 다치거나,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간다거나,

주식이나 노름을 하여 많은 돈을 잃는다 거나, 가정에 우환이 든다거나,

직장을 잃는다 거나, 도둑이나 사기를 당한다거나, 사업을 실패한다거나, 등등..

속상하고 기분 나쁜 일들을 부지기수로 경험하게 된다.

 

반면에, 사람에게 도움을 받거나, 시험에 합격을 하거나, 좋은 직장을 구하거나,

주식이나 노름을 하여 돈을 많이 따거나, 길을 가다 금덩이를 줍거나,

여행을 하며 좋은 구경을 하거나, 병이 나아 건강해지거나,

사업이 성공하거나, 사랑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등등…

즐겁고 기분 좋은 일들 또한 수없이 경험하게 된다.

이 같이 기분 좋은 일과 기분 나쁜 일은

서로의 인과(因果) 과보(果報)로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분 좋은 일은 기분 나쁜 일의 과보(果報)에 의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기분 나쁜 일 또한 기분 좋은 일의 인과(因果)에 의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어느 것이 더, 또는 덜도 없음이다.

 

그러니 마음을 깨친 이는,

이 같은 인과(因果)의 작용이 너무나 당연한 것임을 잘 알기에,

작용하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기분 좋은 일이든, 기분 나쁜 일이든, 결코 분별하거나 집착하지 않으므로,

마음 끄달리지 않고, 여여(如如)하게 중도(中道)의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게 된다.

 

군불견?(君不見?) -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무명실성(無明實性) 즉불성(卽佛性)

환화공신(幻化空身) 즉법신(卽法身)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

 

무명(無明)은 12연기(緣起)가 시작되는 원인이다.

이로 말미암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인과(因果)가 발생한다.

그리고 천상과 지옥을 오가는 윤회(輪廻)가 계속된다.

 

따라서 무명(無明)은 중생을 낳고, 분별(分別)을 낳으며,

결국 우비고뇌(憂悲苦惱-근심,슬픔,괴로움,번뇌)의 고통을 낳는 원인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부처의 성품이라고 하는 논리는 전혀 맞지 않는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무명(無明)의 참 성품은 곧 부처의 성품이라 했는가?

 

지난 구절에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 즉, 망상(妄想)과 참됨을 대비하였다.

망상(妄想)과 참 됨은 서로를 의지하므로 이 둘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로서,

이 둘 모두 필요 없다고 부정적으로 보는 선(禪)의 견해를 소위 쌍차(雙遮)라고 한다.

 

반면에, 무명(無明)의 참 성품이 곧 불성(佛性)이라고 보는

긍정적인 견해를 쌍조(雙照)라고 하는데, 무명(無明)은 무명 그대로 그냥 보고,

불성(佛性)은 불성 그대로 그냥 보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니, 무명(無明)이든 불성(佛性)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무명(無明)이 곧 불성이라 한들 무슨 문제가 있으며,

불성(佛性)을 곧 무명이라 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명실성(無明實性)이라고 했다.

실성(實性)이란 분별(分別)없는 그냥 그대로의 성품이라는 뜻이니 곧, 참 성품을 말한다.

 

따라서 “환화공신(幻化空身) 즉법신(卽法身)” &#8211;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 이라는 것 또한 같은 뜻이니,

우리의 몸은 인연 따라 그냥 왔다 그냥 가는,

그야말로 허깨비와 같은 환(幻)에 불과한 것임에도,

굳이 분별심(分別心)으로 이러쿵저러쿵 할 필요도 없으므로,

이 자체가 법신(法身)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견해는 마음을 깨친 경지에서 보는 것인데,

아무리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이러쿵저러쿵 해본들,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벗어날 수 없으니,

남을 것이 어디에 있으며, 모자랄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유위(有爲-존재하는)세계이든 무위(無爲-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세계이든

이것과 저것으로 분별(分別) 망상(妄想)만 하지 않으면 그 자체가 불성(佛性)이요,

법신(法身)인 것이다.

 

다만, 인과(因果)의 업(業)에 묶여서,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즐겁다 괴롭다,

기쁘다 슬프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생겨난다 없어진다, 한다 안한다,

등등의 분별(分別) 망상(妄想)을 하는 것은, 모두 각자의 자기 몫이다.

즉, 자업자득(自業自得)이요, 자작자수(自作自受)이다. 그 뿐이다.

 

한번 웃으면 한번 울게 되고, 한번 좋으면 한번 싫게 되고,

옳다는 것에 집착하면 그른 것에 집착하게 되고,

태어났다고 분별(分別)하면 죽는다는 분별이 생기고,

배고픔이 생기면 배부름도 생기고,

이렇듯, 모든 것은 상의상존(相依相存) 즉,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니 쌤쌤이다.

 

그리고 모두가 생로병사(生老病死)하여 사라진다.

아니, 사라진다는 분별심(分別心)으로 말미암아 다시 생겨나고 또 윤회(輪廻)한다.

 

개미들이 집단으로 살아간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따지는 사람이 있는가?

그냥 집단으로 살아가다가 집단으로 사라지는 것에만 주목할 뿐,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 역시 개미의 삶을 보는 것과 같이,

그 속에서 어떤일이 일어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냥 살다가 그냥 사라지는 것뿐이다.

 

그러니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사는데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찾는 것 자체가,

고락(苦樂) 인과(因果)의 한 단면일 뿐,

모든 행위는 그 모습 자체로서 부질없는 환(幻)과 같으니,

문제는 내가 지금 당장 마음이 편안 한가이다.

 

지금 바로 이 순간순간, 마음이 여여(如如)히 편안치 않다면,

마음을 아직 깨치지 못한 고로, 무명(無明)이 곧 참 성품이라는 것을 모르는 증거이고,

이 몸이 곧 법신(法身)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며,

고락(苦樂) 인과(因果)에 마음이 걸려 있다는 증거로서 곧, 마음이 편치 않음이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그 어떤 것도 별 의미 없는 인과(因果)의 보습일 뿐이니,

이에 집착하여 머물러 있지 말고,

지금 즉시 마음을 깨치는 일에 매진해야 할지니,

우선 기도와 참선, 보시와 정진부터 시작할지라.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

[불교신문 3803호/2024년1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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