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스님의 반야심경 강설]
- <4> “불자들이 의지할 한가지 경전은 반야심경” -
삼국시대부터 천수경과 함께 스님 전유물로 암송돼온 반야심경
암송하기 최적화된 한역…모두가 깨닫기를 강조하는 수행지침서
불공과 기도의식, 복이나 비는 기복(祈福)이라고 폄훼하기도 해
하지만 예경, 발원, 독경, 염불삼매, 좌선 등 수행이 고루 포함
이론만을 암기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어
제4강 신행의 입장에서 본 반야심경의 위상
한국불교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불교의 집합체와 같다.
앞에서 고려대장경이 거의 모든 교학의 종합적 결정체와 같음을 설명했다.
그럼 한국불교의 신행(信行)은 어떤가.
여기서 신행이라는 용어는 신앙적 측면과 수행적 측면을 모두 아우르는 말인데,
신앙과 수행을 객관적으로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1950년대에서 2000년대의 한국불자들의 신앙은 어떠했을까?
먼저 1950년대에서 1960년대의 상황을 살펴보자.
이 시기 나는 산골에서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나 동네 어른들의 삶에서 당시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불자이긴 했으나 40리 밖에 있는 사찰에 1년에 두세 번 가셨다.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했고,
그저 가족을 위해 불공을 올린다는 정도였다.
절에 가시기 전에는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 온전하지 않은 쌀과 돌을 가려내었고,
찬물로 몸을 씻고 깨끗하게 세탁한 옷을 갈아입고 가셨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당시의 작은 사찰에서 법문을 거의 하지 않았기에
불교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나 걱정거리가 생겼을 때
어머니가 혼자 행한 의식은 주로 정한수(精寒水)를 떠 놓고 비는 것이었다.
달이 밝은 밤이면 장독대 위에 맑은 물을 담은 하얀 사발을 놓고,
달을 보며 손을 비비면서 중얼거리듯 무언가를 비셨다.
가족들의 생일 때는 아침밥을 먹기 전 부엌에다 간단하게 상을 차려 놓고
조왕님을 찾거나 조상님들을 찾으며 비시기도 했다.
또 열 다섯 살 위의 형이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켰을 때는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여 완치되기도 했다.
뒷날 내가 종교학을 공부한 뒤에 회상해보니
1950~1960년대의 한국은 토테미즘(Totemism, 토템신앙),
애니미즘(Animism, 정령신앙), 샤머니즘(Shamanism, 무속신앙),
페티시즘(Fetishism, 물신신앙), 조상숭배(Ancestor Worship),
일월성신신앙(日月星辰信仰) 등이 혼재된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무엇이라도 위안이 되는 것이라면 믿고 의존하려던 것이
당시 민간에 널리 퍼져 있던 신앙의 형태였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에 불안감은 아주 심했을 것이다.
중학교를 부산에서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사찰이라는 곳을 처음 가게 되었다.
춘원선생이 쓴 <원효대사>를 통해 막연히 꿈꾸던 불교에 대한 관심으로
해탈(解脫)이라는 것을 체험하고 싶었기에,
수업을 마치면 학교에서 꽤 떨어져 있던 사찰에 가서
몇 시간이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물론 신도들의 왕래는 거의 없었고, 스님을 만나 얘기할 기회도 없었다.
마치 혼자서 절을 독차지한 느낌으로 그렇게 지냈던 것이다.
그 후 자취를 하게 되면서 주말이면
석암큰스님이 주석하시던 백양산 선암사엘 오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스님과 인연이 되어 방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스님들께 체계적으로 교학이나 수행법을 지도받은 것은 아니었고,
그저 석암큰스님과 뒷날 은사가 되시는 화엄큰스님의 향기에 젖는 것이 좋았을 뿐이었다.
물론 선암사에서도 신도들과 만날 일은 거의 없었고, 법회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간혹 재(齋)를 지내는 불자들을 만나긴 했지만,
체계적으로 불교를 공부하는 수준들은 아니었다.
물론 체계적으로 공부시키는 그런 법회도 없었다.
내가 불교라는 것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고1때부터였다.
특히 포항 보경사(寶鏡寺)에서 부산과 영남의 불교학생회 수백 명
회원들을 위한 4박5일간 합동수련대회를 했을 때의 체험은 특별했다.
네 시간 정도의 취침과 발우공양 및 도량 청소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는
법문과 좌선, 정근과 예참으로 이어졌다.
매일 저녁 1000배의 예참과 마지막 날 3000배의 철야를 통해
6000배의 예참을 하였는데, 단 한 명도 귀가하거나 낙오하는 학생이 없었다.
수련대회를 체험한 뒤 방학기간에는 사찰에 머물며 예불과 기도를 도맡아 했고,
불교학생회 회원 수를 10여명에서 300명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개인적으로는 사찰 탐방도 부지런히 했기에
부산과 경남 일대의 사찰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체험을 바탕으로 얘기하자면 일반신도들을 위한 정기법회는 거의 없었고,
초하루 불공법회를 하는 정도면 주지 스님의 활동이 괜찮은 편에 속하는 수준이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정기법회를 하는 곳은 중고등학생들이 다니던
불교학생회와 대학생불교연합회 및 불교청년회와 불교거사림회(佛敎居士林會)였다.
부산에서는 이 당시 고등학생불자들을 중심으로 불교합창단이 만들어져서
부처님오신날(사월초파일) 각 방송국에 나가 공연을 하기도 했고,
정기법회를 통해 찬불가를 보급하고 반야심경을 암송하는 의식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반 불자들에게는 찬불가도 반야심경 암송도 낯설기만 했었다.
1970년대에서 1990년대의 일반 불자들의 신행은 어떠했을까?
수행자인 내 눈에 비친 1970년대의 사찰들은 수행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신도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스님들이 스스로 해결하던 때였다.
어찌 보면 사찰이 운영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신도들이 모이질 않았다.
당시의 사찰은 정초불공, 사월초파일 등공양비, 백중기도, 동지불공으로
겨우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였다. 그러니 신도들의 교육 역시 요원하던 때였다.
1980년대에는 포교에 열정을 가진 스님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기도와 법회에 참석하는 신도들의 숫자가 서서히 늘기 시작했다.
1990년대가 되면 불교라디오방송국인 BBS와 불교TV방송국인 BTN이 개국하였고,
오래된 불교신문사(1960년) 와 법보신문(1988년)에 이어
현대불교(1994년)가 창간을 하면서 대중적인 포교가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사찰들의 불공의식과 법회의식이 정착되었다.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시대부터는 <반야심경>이,
고려시대부터는 <천수경>도 스님들의 전유물처럼 암송되었다.
그러다가 현대에 이르러 수십 년 동안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수많은 스님들 덕분에
신도들이 불공과 예불의식에 동참하게 되면서,
두 경전은 신도들도 암송하는 가장 사랑받는 경전이 되었다.
<반야심경>은 암송하기에 최적화된 한역(漢譯)이면서 모두가 깨닫기를 강조했고,
<천수경>은 참회와 예경, 찬탄과 발원 및 깨달음의 선구(禪句)까지 잘 갖추었다.
결론적으로 두 경전은 아주 멋진 수행지침서이다.
한국불교신자들의 불공과 기도의식을 두고 직접적인 깊은 체험이 없는 이들은
복이나 비는 기복(祈福)이라고 폄훼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 의식에는 예경, 발원, 예참, 독경, 염불삼매, 좌선 등의 수행이 고루 포함되어 있다.
의식의 깊은 뜻을 잘 이해하고 정진한다면,
이론만을 암기하는 것보다는 훨씬 깊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 불자들이 의지해야 하는 한 가지 경전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반야심경>을 꼽는다.
[불교신문 3857호/2025년2월11일자]
서울 개화사 주지 송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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