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우리들은 귀한 인연들 입니다.
불교 이야기

- <10> 반야바라밀은 수행이 완성되어 깨달았을 때 발현 -

by 수선화17 2026. 1. 19.

[송강 스님의 반야심경 강설]

- <10> 반야바라밀은 수행이 완성되어 깨달았을 때 발현 -

 

자신의 내면에 불성이 있다는 것과

수행하면 그 불성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흔들림 없이 믿고 이해하며, 목숨을 걸고 정진하여

불성자리와 계합할 때 지혜완성의 삶이 열린다.

 

제10강 반야심경 요지(2)

(가) 반야심경의 요지 2.

<반야심경> 핵심적 요지 부분에서 두 번째 요점은 다음 문장이다.

②깊은 깨달음의 지혜완성을 이루었을 때(行深般若波羅蜜多時)

행(行)에 해당하는 산스끄리뜨 짜르야(caryā)는 한역(漢譯)에서

행(行), 소행도(所行道), 소행지도(所行之道), 유행(遊行), 업(業), 사(事) 등으로 옮겨졌다.

또 깊다(深)에 해당되는 감비라(gabhr)는 한역(漢譯)에서

심심(甚深), 극심심(極甚深), 심오(深奧) 등으로 번역된 단어이다.

따라서 ‘심오한 지혜완성의 삶이 되었을 때’로도 번역할 수 있다.

사유의 영역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이 문장은 깨달음에 이른 관자재보살의 경지이다.

다시 말해 관자재보살처럼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지혜의 완성(반야바라밀)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 하는 이유이다.

적극적인 수행을 하기 어려운 이들은 ‘불교철학’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그러면 불교는 사유의 영역으로 떨어진다.

그러기에 깨달음에 목숨을 건 수행자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석가모니께서 사유만으로는 해탈할 수 없음을 몸소 보여주셨다.

12세 무렵부터 싯다르타는 당시의 모든 학문으로도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방법은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싯다르타는 틈만 나면 숲으로 들어가 나무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사색에 잠겼다.

한 번 앉으면 모든 것을 잊을 정도로 몰입했지만,

사유(思惟)의 힘으로도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할 수는 없었다.

29세까지 지속된 이 모습은 미륵반가사유상(태자사유상)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싯다르타가 출가하여 찾아간 이는 요가선정의 대가였던 알라라 깔라마로,

그가 도달한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즉 선정에 들었을 때

일체의 존재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는 경지에 싯다르타는 도달했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목표로 삼았던 해탈(解脫)의 경지가 아니었다.

이어 더 높은 요가선정의 대가인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갔다.

그곳에서 싯다르타가 터득한 경지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었다.

이 선정에 들어있을 때는 욕망이나 물질의 영향을 받지 않지만

미세한 생각의 흐름이 남아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 또한 싯다르타가 목표로 삼았던 절대자유의 해탈경지는 아니었기에 곧바로 떠났다.

 

그리고 다시 6년간의 극심한 고행(苦行)을 했으나

잘못된 방향 때문에 깨닫지를 못하자 극단적인 고행을 그만 두셨다.

체력을 회복한 싯다르타는 자리를 바꿔 부다가야의

아슈바타(Aśvattha, Pippala) 숲으로 들어가셨다.

그곳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깊은 내면의 탐구를 시작하셨다.

이윽고 온갖 번뇌가 다 사라진 멸진정(滅盡定, nirodha-samāpatti)을 넘어

깊은 내면의 청정자성(淸淨自性, 本性)과 계합(契合)하셨다.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다.

이 경지가 바로 지혜의 완성(般若波羅蜜)이다.

 

내가 살펴본 고타마 싯다르타의 삶은,

십대부터 깨달음에 이른 삼십대 중반까지

누구도 따라 하기 어려운 수행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면 가장 부러운 위치에 있던 싯다르타가 아니던가.

그러니 목숨을 던져 들어가야지,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수행이라고 할 수 없다.

 

자! 깨달음의 지혜완성(般若波羅蜜)은 어떤 경지일까?

최고의 대승경 가운데 하나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수지(受持) 독송(讀誦)하던 경전이다.

그 인연으로 천태지관(天台止觀)을 연구했고 논문도 썼다.

1989년 송광사 전체 학인 스님들을 대상으로 천태의 교상(敎相, 교학의 핵심)과

지관(止觀, 수행의 핵심)까지 1주일간 매일 여섯 시간씩 특강을 했는데,

많은 학인들이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법화천태(法華天台)는 교리적인 체계와 수행적인 처계를 거의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기에,

본격적으로 수행을 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굉장한 도움이 된다. 

어떤 이는 법화경이 오히려 수행을 못하게 방해한다고도 하고,

또는 법화경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중생이 곧 부처임을 밝혔으니

수행이 필요 없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제대로 공부한 일이 없는 사람의 주장일 뿐이다.

 

묘법연화경의 중요한 가르침에 회삼귀일(會三歸一)이 있다.

이것은 사람의 자질 따라 방편적으로 가르쳤던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은 임시적인 것일 뿐 오직 일불승(一佛乘)만 있다는 것이다.

일불승(一佛乘)이란 불교의 최종 목표는 오직 부처가 되는 것만 유일하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일곱 가지 비유(法華七喩)를 통해

마침내 최후의 부처자리에 이를 수 있도록 가르침을 펼쳤다.

 

묘법연화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크고 유일한

목표(一大事因緣)를 <방편품>제2에서 이렇게 밝혔다.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께서 깨달은 지혜와 견해를 열게 하고(開佛知見),

보게 하며(示), 깨닫게 하여(悟), 불지견도에 들게(入佛知見道) 하시려고

이 세상에 출현하셨다(出現於世).’

묘법연화경에서 설명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지혜와 견해(佛知見)’를 열어서

보고 깨달아 들어가는(開示悟入)이야말로,

반야심경에서의 지혜의 완성(般若波羅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인 육바라밀에 속한다.

즉 베푸는 삶인 보시바라밀(布施),

자신을 제어하는 삶인 지계바라밀(持戒),

모든 것을 다 품어가는 인욕바라밀(忍辱),

가장 바르게 노력하는 삶인 정진바라밀(精進),

언제나 맑고 고요한 삶인 선정바라밀(禪定).

최고의 지혜로 충만한 삶인 반야바라밀(般若)의 여섯 가지가 육바라밀이다.

그런데 앞의 다섯 가지는 닦는다는 표현이 어울리지만,

마지막 반야바라밀은 닦는 것이 아니라

수행이 완성되어 깨달았을 때 발현되는 것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앞의 다섯 가지도 번뇌가 없는 경지에서의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이라야 완성단계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때 반야바라밀이 빛을 발하게 되고,

반야바라밀이 빛을 발할 때 앞의 5바라밀도 완성된다.

 

불교의 수행단계를 간략하게 믿고(信), 이해하며(解), 실천하여(行), 증득한다(證)고 설명한다.

자신의 내면에 불성(佛性)이 있다는 것과 수행하면

그 불성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흔들림 없이 믿고 이해하며,

목숨을 걸고 정진하여 이윽고 그 불성(佛性) 자리와 계합(契合)할 때

비로소 지혜완성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럼 지혜완성의 삶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자신이 어디에 있건 어떤 상황에 놓였건,

마음속에 완전히 괴로움 없는 상태가 지속된다면 지혜완성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 개화사 주지 송강스님.

[불교신문 3863호/2025년3월25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